아흔아홉 해, 모래알처럼 흩어진 시간의 강둑에 홀로 앉아 나는 마지막 숨을 고른다. 뼈마디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낡은 풍금 소리처럼 귓가에 울리고, 한때는 세상을 호령하던 기백도 이제는 잦아드는 촛불처럼 희미하다. 귀향. 이 단어는 지친 영혼을 위한 안식인 동시에, 모든 것의 종언을 알리는 서늘한 예감이다. 노쇠한 육신은 병마에 시달려 남은 생의 무게를 힘겹게 지탱하고 있으며, 안개처럼 흐릿해지는 시야 너머로 삶의 마지막 정거장이 어렴풋이, 그러나 거역할 수 없는 실체로 다가온다.
내 인생, 한 세기에 가까운 여정은 격동이라는 말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나는 기억한다, 포탄이 쏟아지는 밤하늘 아래서 새벽을 기다리던 공포를. 폐허가 된 도시의 잿더미 속에서 가냘픈 들꽃 한 송이를 발견했을 때의 경이로움을. 평화와 전쟁이 지겹도록 교차했고, 파멸의 잿더미 속에서 희망의 새싹이 위태롭게 움텄으며, 종말의 절망 위에서 재건의 깃발이 눈물겹게 나부꼈다. 살육의 광기와 용서의 눈물이 뒤엉켜 흐르던, 실로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한가운데를 나는 부서지기 쉬운 조각배처럼 위태롭게 부유하며 건너왔다.
행복했는가? 불행했는가? 감히 단언하기 어렵다. 빛이 강렬했던 만큼 그림자 또한 짙었으나, 어느 한쪽에 온전히 치우치지 않았던 삶. 대모님의 간곡하고 지혜로운 충고를 평생의 나침반으로 삼아, 험난한 세상 속에서도 선한 벗들을 곁에 두었고, 그들과 함께 이 상처 입은 땅, 파괴와 고통으로 얼룩진 대지를 지키고자 나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쏟아부었다. 운명의 장난인가, 아니면 신의 마지막 배려인가. 나는 아직 살아남았다. 그러나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때로 견딜 수 없는 형벌로 다가온다. 내 몸뚱이보다 더 소중했던 나의 연인, 나의 벗들이 모두 시간의 강 저편으로 떠나버린 지금, 텅 빈 의자, 식어버린 찻잔, 더 이상 나를 부르지 않는 목소리들. 남겨진 자의 고독은 뼛속까지 파고드는 한기(寒氣)와 같아, 새벽의 적막함 속에서 그들의 빈자리는 더욱 시리고 아프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나는 감사한다. 육신은 시간의 풍화작용 속에 스러져가는 폐허일지언정, 기억의 성채만큼은 아직 굳건하다는 사실에. 느리지만 음식을 넘길 수 있는 작은 기쁨에, 떨리는 손으로나마 펜을 쥘 기력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나에게는 완수해야 할 마지막 의무, 아니, 숙명이 있기 때문이다. 스러져가는 촛불처럼 희미해지기 전에, 나의 시대를 관통하며 불꽃처럼 살다 간 의인들의 이야기를 후세에 남겨야 한다. 어쩌면 이것은 미래를 살아갈 이들에게 보내는 위태로운 경고이자 뼈아픈 교훈일 수도 있고, 우리 세대가 저지른 지울 수 없는 과오에 대한 처절한 반성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종말과 파멸의 시대를 온몸으로 버티고 마침내 극복하기 위해 모든 것을 불살랐던, 저 고귀한 영혼들에 대한 진혼곡이자, 그들의 삶을 향한 나의 마지막 경배라는 점이다.
그 영혼들의 연대기는 나의 사랑, 나의 아내,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연인이었던 <나탈리아>로부터 시작되어야 마땅하다. 그녀의 이름은 내 삶의 모든 페이지에 새겨진 서문이자 결론이며, 흔들리는 내 존재를 붙들어 준 유일한 닻이었다. 그녀는 단순한 기록자를 넘어선 위대한 역사가였고, 시대의 모순을 꿰뚫어 보는 날카로운 통찰력을 지닌 저술가였으며, 필요할 때는 불굴의 의지로 불의에 맞서 싸운 전사였다. 예언가이셨던 장인어른, 니콜라스의 불가해하고 때로는 광기 서린 듯한 읊조림을 한 자도 놓치지 않고 기록한 <나탈리아의 일기>와, 전쟁의 참혹한 민낯과 그 속에서 피어난 인간성의 파편들을 생생하게 증언한 <나탈리아의 편지>는, 이제 내가 풀어낼 이야기의 굳건한 반석이자 흔들리지 않는 등대가 될 것이다. 실토하자면, 나는 아내의 기록이라는 거대한 바다 위를 표류하며 세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 가장 큰 수혜자일 뿐이다. 그녀는 글자를 깨우친 순간부터, 마치 그것이 존재의 이유인 듯, 연필과 종이만 주어진다면 세상의 모든 것을 담아내려는 듯, 끊임없이 기록하고 또 기록했다.
나탈리아는 아버지 니콜라스가 깊은 잠에서 깨어나 몽롱한 상태에서 토해내는 모든 말을, 마치 신탁을 받아 적듯, 한 자 한 자 소중히 일기장에 새겼다. 그것이 단순한 환영이나 잠꼬대가 아닌, 미래를 꿰뚫는 예언임이 판명되자, 그녀는 자신의 남은 생애 전부를 그 예언의 정확한 해석과 검증, 그리고 그것을 현실에서 실현하거나 혹은 다가올 재앙을 막아내기 위한 실천에 헌신했다. 나는 경탄과 존경의 시선으로 그녀의 세밀하고 꼼꼼한 기록들을 바라보았다. 잉크 냄새가 밴 그녀의 손가락, 예언의 무게에 눌려 깊어진 미간의 주름, 그리고 진실을 향한 흔들림 없는 눈빛. 그 모든 것을 사랑했다. 그녀가 써 내려간 문장 하나하나를 읽으며 나는 비로소 세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고, 그 과정에서 우리의 사랑은 얕은 강물이 깊은 바다를 만나듯 거대하고 단단해졌다.
그녀의 모든 기록은 이제, 동쪽 끝, 세상의 아침이 가장 먼저 시작되는 땅, 바로 <신의 땅>에 천년의 세월을 굳건히 버티며 우뚝 솟은, 세상 모든 지식의 고향이라 불리는 <가르니에> 수도원 도서관 깊숙한 곳에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다. 그곳에서 그녀의 글은 단순한 종이 뭉치가 아닌, 미래 세대의 어둠을 밝힐 영원한 등불이 될 것이다. 내가 간절히 바라던 바가 마침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이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아내의 방대한 저술이라는 거대한 산맥을 더듬어 오르는, 미약한 등반가의 기록과 같을 것이다. 그녀의 글을 요약하고, 거기에 나의 희미한 경험과 기억의 조각들을 살짝 덧대는 정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성될 책의 분량이 결코 만만치 않을 것임을 예감한다. 그녀가 남긴 기록의 양이 실로 바다처럼 깊고 넓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새로운 글을 창조하기보다는, 기존의 내용을 선별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며 간추리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음을 나는 뼈저리게, 매 순간의 호흡마다 느낀다. 죽음이라는 냉혹한 편집자가 나의 떨리는 펜을 멈추게 할 때까지 글쓰기를 멈추지 않으리라 다짐하지만, 그 마지막 순간이 오늘 저녁 노을과 함께 찾아올지, 아니면 내일 새벽의 여명과 함께 다가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나는 서둘러야 한다. 내 인생의 가장 결정적인 만남들, 가장 찬란했던 순간들과 가장 어두웠던 기억의 심연들을, 한 권의 책 속에 봉인해야 한다. 나의 첫 작품이,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이 기록이 완성된 후에도, 운 좋게 내게 여전히 숨 쉴 기력이 남아 있다면, 나는 신께 깊이 감사하며,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그녀가 미처 다 기록하지 못한, 혹은 내가 직접 겪어야 했던 또 다른 이야기들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마지막 숨결이 사그라드는 그 순간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