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떻게 서울 가는 고속버스표를 끊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심지어 내가 어떻게 대전 시외버스터미널까지 왔는지도 잘 모르겠다. 나는 지금 엄청난 분노에 싸여있다. 나는 대기실 벤치에 앉아 분을 삭이지 못해 부들부들 떨기까지 한다.
“우리 사회 남녀 불평등이 하루빨리 해소되기를 바랍니다.” 남자는 나를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속삭였다.
“네. 맞습니다. 직장 내 성차별 많이 개선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차별이 존재하니깐요.” 나는 기분 좋게 와인을 들이키며 한없이 너그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저는 늘 주장합니다. 동일 노동이면 동일 임금 주고 동일 진급하고 동일 휴가 주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전적으로 옳으신 생각이십니다.“
”맞습니다. 이제야 마음이 통하는 여성분을 만난 것 같습니다. 정말이지 오늘 기분이 좋습니다.“
”네. 저도 비로소 인연을 만난 것 같아서….“
”모든 것은 공평해야 합니다. 공평하면 분쟁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자기가 먹은 식대는 자기가 내면 됩니다. 공평하죠. 결혼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생활비 절반씩 공평하게 내고 육아도 공평하게 하루하루 번갈아 가며 하고 혼수 비용 절반 공평하게 내고 아파트 구매도 절반 공평하게 내어 공동소유하고 각종 세금 부대비용 등등 모든 거 절반씩 공평하게 내면 됩니다. 이 얼마나 평등한 세상입니까! 안 그러습니까?“
”네? 자기가 먹은 식대라고요?“ 나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네. 그렇죠. 본인이 내야죠. 당연히. 공평하게. 어떻습니까? 제가 근사한 맥줏집 알고 있는데 2차로 가시겠습니까?“ 남자는 일어나 성큼성큼 계산대로 갔다. 갑자기 술이 확 깼다. 내가 헛것을 들었는지 볼을 꼬집어보기까지 했다. 불안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저놈이 방금 도대체 뭐라 씨불이며 간 거야?’
나는 살며시 화장실로 들어가 시간을 끌었다. 그리고 조용히 나와 라운지 문으로 향했다. 심장이 벌컥벌컥 뛰었다. 하지만 내가 문의 손잡이를 잡는 순간, 누군가가 나를 붙잡았다.
”고객님 죄송하지만, 결제가 안 되었습니다.“ 올 것이 오고 말았다.
”네?“
종업원이 영수증을 내밀었다. 그곳에는 남자가 먹은 스테이크와 와인 절반 값만 결제가 되어 있었다.
‘이 더럽고 치사하고 아니꼬운 새끼!’ 순간 나는 끝없는 심연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이런 새끼 만나려고 내가 피 같은 돈 끌어모아 수술까지 하다니!’
”그럼 얼마?“
”네. 16만 5천 원 결제하시면 됩니다. 고객님.“
앞이 캄캄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호 혹시 할부 가능한지’라고 물어보려는 순간 어느새 그놈이 내 곁에 다가와 있었다. 나는 지갑에서 신용카드를 집었다가 내려놓고 체크카드를 끄집어냈다. 신용카드는 결제가 안 될 가능성이 컸다. 한껏 자존심이 구겨질 대로 구겨진 나는 이 더러운 개자식에게 그런 치욕까지 당하고 싶지 않았다.
은행 잔고 만오천 원. 나는 지갑을 탈탈 털어 현금으로 버스표를 겨우 마련했다.
나는 버스에 타자마자 등받이를 있는 힘껏 젖힌 다음 쓰러질 듯이 누웠다.
‘저 치사한 새끼 만나려고 어젯밤 잠까지 설쳤는데…. 내가 병신 쪼다 같은 년이지….’
나는 버스 바닥을 있는 힘껏 발로 한번 구르고 눈을 감았다. 마음 같아선 이 버스와 함께 데굴데굴 구르다 콱 처박혀 산산조각 부서지고 싶었다. 초라하기 짝이 없는 존재. 그런데 그때였다. 또다시 누군가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손님. 등받이 조금만 올려주세요. 뒷사람이 불편해하십니다.“
눈을 떠 보니 중년의 운전사였다. 그는 공손한 표정과 온화한 미소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내게 그는 쪼잔한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새끼와 다를 바 없는 남자였다.
”못하겠는데요. 뒷사람 불편한 게 제 탓입니까? 한껏 젖혀진 이 의자 탓이지!“ 나는 버럭 화를 내며 눈을 감았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 그 순간 내게 딱 맞는 속담이었다.
”손님, 이 버스는 누워서 가는 리무진 버스가 아닙니다. 일반 버스에요. 조금만 양해해주세요.“
”아니, 애초에 이만큼 젖혀지게 만든 거잖아요! 뭐가 문제에요? 공장에서 이렇게 생산되어서 나온 건데. 버스 제조회사에 가서 따지세요. 씨팔!“ 나는 참았던 울분을 토해내듯 사방을 둘러보며 욕설을 뿜어 재꼈다. 그러자 뒷좌석에서 어떤 젊은이가 외쳤다.
”다른 사람 피해가 되니까 그런 거죠. 조금만 양보하세요. 자유라는 게 남에게 피해는 주지 말아야 하잖아요.“
”거절하는 것도 나의 자유야! 이 개자식아!“ 나는 벌떡 일어나 녀석에게로 달려들 듯한 표정으로 째려봤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놀라고 말았다. 뒤에 탔던 모든 승객이 휴대폰으로 나를 찍고 있었다.
”그럴 거면 리무진 버스 타세요!“ 어디선가 누군가가 이렇게 외쳤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봐!“ 이런 소리도 들려왔다.
”나이 처먹었으면 그냥 곱게 가!“ 저런 소리도 울려 퍼졌다.
”너나 잘해! 이 더러운 관종 새끼들아!“ 나는 소리 나는 쪽으로 죽일 듯이 달려들어 나를 찍고 있는 녀석 중 휴대폰 하나를 뺏었다. 그리고 화면을 들여다봤다.
<곧바로업> 앱이었다. 내가 지극 정성으로 만든 앱. 수려한 인터페이스. 편리한 다기능.
촬영과 동시에 실시간으로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틱톡, 유튜브뿐만 아니라 전 세계 444군데 커뮤니티 사이트와 66군데 무료 동영상 플랫폼에 자동 등록되는 편리하기 짝이 없는 앱. 게다가 음성 캡처와 자동 번역기능까지. 누가 봐도 매력적인 내가 만든 바로 그 앱.
나의 사랑스런 자식 같은 앱이 지금 나를 천하의 몹쓸 <버스 민폐녀>로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