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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발버터 Aug 09. 2023

충분히 의미 있겠죠.

(5) 이별후유증

‘아, 이번 시험도 망했구나.’

그렇게 공시생으로서 끝을 보리라 다짐했던 세 번째 시험이 끝났다. 

역시 현실은 드라마와 다르다. 아니, 내 인생만 다를지도 모르겠다.


심리학 이론에 따르면 이별하는 순간이 찾아오면 일반적으로 5단계의 이별 후유증을 겪는다고 한다. 

나 또한 첫사랑과 헤어졌던 이십 대 초반, 낮에는 분노와 우울의 롤러코스터를 탔으며, 밤에는 두통에 시달려 며칠간은 타이레놀을 먹고 간신히 잠이 들어야 했었다. 

그로부터 십 년 뒤, 공시생의 길로 들어서고 이년 간 이성과 말 한번 제대로 못 해 연애 세포가 다 죽어가던 이 시기에 갑작스러운 이별 후유증이 찾아왔다.     


1단계 (부정) : 에이 이건 내 실력이 아니야. 그냥 운이 없었을 뿐이라고. 이상하게 행정법이 눈에 안 들어와서 그래. 평소에는 이것보다 훨씬 잘 본다고. 그래, 이건 내 점수가 아니야. 그냥 운이 안 좋았을 뿐이야.     


2단계 (분노) : 하. 열 받는다. 2년을 넘게 공부하고 이딴 점수라고? 대체 그동안 뭐 한 거지? 공부한 거 맞아? 진짜 한심해 죽겠다. 진짜 나가 죽어라. 이럴 거면 무엇 하러 시작했냐. 그냥 시작하지 말던가. 시간만 축내고 뭐 하는 짓이야! 진짜.     


3단계 (타협) : 분명 다른 사람들도 못 봤을 거야. 내가 어렵다고 느꼈으니까 분명 합격선도 떨어질 거야. 그러니까 아직 가능성 있어. 일단 예상 합격 컷을 기다려보자.     


4단계 (우울) : 아무리 떨어진다고 해 봤자 합격선이 거기서 거기지. 그래. 역시 나는 안 되는 애였어. 나 같은 돌대가리가 무슨 공무원을 한다고. 그냥 때려치우자. 넌 1년을 더해도 반드시 떨어질 거야. 네가 1년 한다고 뭐 달라지겠냐.     


5단계 (순응) : 이건 공무원을 하지 말라는 신의 계시인가? 요즘 공무원 인기도 많이 떨어지고 있잖아. 공무원 연금도 박살 났다고 하고. 그래. 이건 어쩌면 공무원의 길로 가지 말라고 하는 신의 뜻일 수도 있어. 오히려 좋아.     


그러나 가장 마지막에 남은 감정은 창피함이었다. 

가장 부끄러운 건 합격 소식을 가장 기대하는 가족들에게도, 공부를 핑계로 만나지 못한 친구들에게도 아니었다. 내 자신이었다. 이번에는 정말 자신이 있었기에 스스로가 더욱더 한심했다. 떳떳하지 못했다. 뉴스에서 가끔 청년 고독사가 나오는 걸 봤다. 

차라리 지금 당장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 사람들과 연락을 끊고 살아야만 하는 필연적인 무언가가 일어났으면 좋겠다. 불가항력적인 일이 일어나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그런 일조차도 내겐 허락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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