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여자친구를 보러 나갔다가 육아를 잠깐이나마 돕게 되었다. 여자친구의 언니, 그러니까 만약 내가 미래에 결혼을 하게 된다면 형부가 될 분의 아이들이었는데, 아이들은 겉으로는 굉장히 귀엽고 예뻤다. 아이들 특유의 보송보송, 말랑말랑함이 느껴져 보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보는 것이 제일 좋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아이들을 내가 전업으로 보게 된 것도 아니고, 여자친구의 언니분께서 아이들을 보고, 나와 여자친구는 그냥 옆에서 보조 역할을 하는 정도였다. (여자친구의 표정이 굉장히 좋지 않았는데, 그 표정을 보았을 때 도망하는 것이 좋았겠으나, 진짜 도망갈 수는 없었다. 그래도 우리는 운명 공동체가 아닌가.)
아이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궁금한 것을 물어본다. 궁금한 것도 꽤나 많아서, 어른 중에 호기심이 많다는 사람은 호기심 축에도 못 낀다. 미끄럼틀이 타고 싶으면 미끄럼틀과 비슷한 것만 봐도 일단 발걸음을 세우고 우리를 끌고 간다. 미끄럼틀이 아니라고 이야기해 줘도 소용이 없다. 아이는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보아야 믿는다. 미끄럼틀이 아니라 벤치라는 것을, 미끄럼틀이 아니라 조각상이라는 것을, 그저 웃기게 생긴 나무라는 것을. 어른들의 세계에는 미끄럼틀이 그렇게 많지 않고, 많을 수도 없고, 많이 필요하지도 않다는 것을 아이는 이해하기 어려웠나 보다. 미끄럼틀을 타지 못하고 지나가는 길에 거북이 모양 놀이터를 보고는 꼭 거기에 들어가 봐야겠는 마음이 들었는지, 또다시 우리 모두를 끌어당긴다. 아이를 따라 거북이 놀이터로 도착해 아이를 한참 바라본다. 아이는 혼자여도 잘 논다. 거북이 등에 있는 여러 구멍으로 머리를 내밀기도 하고, 다시 들어가기도 한다. 거북이 모양을 보고 웃기는지 여러 차례 크게 웃기도 한다. 아이의 순수함이 내심 부러우면서도, 이것이 진짜 동심이구나, 싶다. 어른들은 절대 흉내 낼 수도 따라 할 수도 없는 순수함. 하얀 도화지와 같은 무지함에서 오는 절대적 순수함.
아이는 한참 눈밭에서 그렇게 뛰어다니다가, 결국 우리와 발걸음을 함께 한다. 우리는 지쳤고, 쉬고 싶었다. 나는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견딜만했으나, 여자친구와 언니는 아침부터 아이들과 놀았기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뛰어다니는 아이의 동생은 유모차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방긋 웃기도 하고, 침을 흘리기도 하고, 재채기를 하기도 했다. 아이는 때로는 자신에게도 관심을 달라는 듯 울었고, 그럴 때마다 관심이 잠깐 집중되었다. 물론 앉아있는 아이는 다칠 수도, 말썽을 부릴 수도 없으니 우리의 정신은 곧 뛰어다니는 아이에게로 집중되었다. 뛰어다니는 아이는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온갖 행동을 한다. 눈을 집어던지기도 하고,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깔깔 웃기도, 칭얼대기도, 짜증을 내기도 한다. 어른이야 조금 힘들고 마음속에 짜증이 인다 한들, 겉으로 드러내는 것이 얼마나 미성숙한지 스스로 느끼기에 마음속의 짜증을 드러내기 조심스럽지만 아이는 아직 그런 것을 모른다. 그래서 아이는 거침없이 짜증을 낸다. 나는 조심스러워하고, 아이는 짜증을 낸다. 아이들을 대하는 것이 업이지만 그 아이들은 이렇게 작지 않다. 학교에서 접하는 가장 어린아이들도 이 아이보다는 한참 먼저 태어난 아이들이다.
유모차에 있는 아이는 이제 20개월이 되었다고 했다. 태어난 지 20개월이라. 20년도 아니고, 20개월. 나는 20개월 전에도 어른이었다. 지금처럼 입 주위가 파랗고, 머리가 새까만 어른이었다. 키도 지금과 비슷했고, 몸무게도 지금과 비슷했다. 끼니때마다 먹는 양도 비슷했고, 하는 생각도 비슷했다. 그러나 이 아이는 아니었다. 20개월 전의 아이는 세상에 없었다고 추정되거나 혹은 있었다고 한들 매우 작은 존재로 눈에 보이지 않게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아이는 20개월이 지난 지금은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를 보다가 내가 쳐다보면 다른 곳을 바라본다. 또 내가 다른 곳을 바라보면 나를 바라본다.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묘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는 아이가 신기하다.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을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내가 그 시절을 조금이라도 기억한다면, 아이가 무언가 필요해서 울 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을 텐데. 나도 분명 저렇게 울고 보챘을 것인데, 왜 울고 보챘는지 기억이 나질 않으니.
아이들을 데리고 지하철로 향했다. 원래 내가 차를 가지고 아이들과 지친 어른들을 태우기로 했으나, 눈이 많이 온 탓에 걱정되어 차가 아니라 지하철을 선택했다. (날씨가 춥고 눈이 많이 와서 이런 선택을 했지만 곧 후회했다. 도로에는 눈 한 톨도 찾아볼 수 없었고, 날씨도 그렇게 춥지 않았다. 이 잘못된 선택이 얼마나 큰 후회를 불러오게 되었는지.) 지하철로 들어가 열차를 타고, 다시 갈아타고. 통로를 걷고, 엘리베이터를 찾는다. 유모차는 에스컬레이터도, 계단도 이용할 수 없다. 경사로가 있기 힘들 만큼 가파른 계단들이 즐비하기에 엘리베이터가 조금 더 많았으면 했다. 평소에는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던 일들이 너무나 불편하게 다가온다. 내가 만약 엄마라면, 이 아이 둘을 나 혼자 데리고 나왔다면.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칭얼대는 아이를 업고, 아이들에게 필요한 물건이 든 거대한 가방을 낑낑거리며 든 채로 이곳을 비집고 다녀야 한다니. 사람들은 배려심 넘치게도 흔쾌히 길을 비켜주었지만, 플랫폼 끝에서 끝까지 걸어가는 수고를 덜어줄 수는 없었다. 이 역이 설계될 때는 이런 상황을 고려하지 않았겠지. 왜 사람들은 모를까. 교통 약자에게 필요한 것은 도움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 없는 환경이라는 것을.
아이를 데리고 식당으로 향해 밥을 먹고, 택시에 겨우 태워 보냈다. 택시에 유모차를 싣는 과정에서도 약간의 난관이 있었지만 곧 해결했다. 아이를 키우는 것이 이렇게 힘든 것이구나. 아이들은 끝없이 도움을 갈구하고, 도움을 아무에게나 구하지도 않는다. 나는 언제나 아이들을 돕고 싶었고,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아이들은 낯선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 생물학적인 본능인지, 후천적인 교육의 성과인지 아이들은 엄마에게만 도움을 요청한다. 엄마는 몸도 마음도 하나뿐이다. 아이는 둘인데, 엄마는 한 명이다. 아이에게 분유를 주는 와중에도 다른 아이는 엄마에게 안기고 싶어 한다. 밥을 먹이는 와중에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어 한다. 걸어가는 중에도 자고 싶어 한다. 아이는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없기에 칭얼대고 운다. 아이에게는 그것이 최선의 설득 방법이기에, 아이는 운다. 우는소리를 들으며, 가방을 뒤지는 모습을 보며 문득 우리 엄마가 생각난다. 우리 엄마도 그랬겠지. 수많은 다른 엄마들이 그렇듯, 우리 엄마도 그랬을 것이다. 나는 지금 잘난척하며 글을 쓰고, 내 자아를 뽐낼 동안 엄마는 자아를 발견할 시간도 없이 살아왔을 것이다. 자신이 뭘 잘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 고민할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아이들은 울고, 도움이 필요하니까.
아이들을 보다 보니 내 모습이 보인다. 도움이 필요하다고 울었을 내 모습이, 배고프다고, 기저귀를 갈아달라고, 간식이 먹고 싶다고 떼를 썼을 내 모습이 보인다. 나도 배려를 받았구나. 나도 내가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분명 누군가의 배려를 받고 살았구나, 싶다. 내일 아이들을 또 본다. 내일은 더 잘해줘야지. 가는 길에 아이가 좋아한다는 빵이라도 하나 사갈까 싶다. 그래, 내가 이 아이에게 베푼 친절이 또 다른 친절이 되어 돌아갈 것이다. (모든 부모님들에게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