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당일만 해도 나는 확고한 의지로 다짐했었다. 다시는 내 인생에 수험 국어를 공부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하지만 스물넷의 나는 다시 열아홉 때와 같은 마음으로 책상에 앉게 되었다. 생각보다 공부는 버거웠고 주기적으로 슬럼프도 찾아왔었다.
어느 날에는 당장이라도 시험을 보면 붙을 것만 같아 자신감에 벅차오르기도 했고, 어느 날에는 망연자실하느라 침대에서조차 벗어나지 못하며 나 자신을 포기했던 나날들도 있었다. 시간은 정말 쏜살같이 지나갔다. 그 당시에 나는 미처 알 수 없었다. 그 시간들도 다 내 성장의 과정들이었다는 사실을.
그렇게 길게만 느껴졌던 11개월의 시간이 흘렀고, 필기시험 당일 날이 되었다. 숙면을 취하진 못하였어도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고, 더 이상 지겨워서 문제집을 볼 힘도 없었기에 당장이라도 해치워버리고 싶은 마음으로 시험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 실제 경쟁자들을 실물로 처음 접한 순간이었다. 알 수 없는 자신감이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다들 눈이 초췌하고 어딘가 불안해 보이고 찌들어있는 듯한 모습이었기에 내가 복도에서 어깨만 펴고 걸어가도 모두가 나한테 주늑들어하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렇게 시험이 시작되었다.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여유롭게 문제들을 풀어나가면서 내가 실제 시험을 보고 있는 건지 모의고사를 풀고 있는 건지 경계가 모호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거침없이 문제들을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기계적인 나의 손놀림을 감독관마저 흥미롭게 지켜보는 듯한 시선까지 느껴졌다. 그렇게 중간중간 난해하며 지엽적인 문제들도 있었지만 주어진 시간 내에 여유롭게 검토까지 마치고 책상에서 손을 뗐다.
부모님 차를 타고 집을 가면서 싱숭생숭한 기분을 느끼긴 했지만, 어딘가 자신감이 있었다. "붙었다."라는 나름의 확신이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닳고 닳았던 핸드폰을 집 근처 매장에서 새것으로 교체하고 집에 도착해서 답안이 나오기를 학수고대했다.
오후 두 시, 사이버 국가고시 센터에 답안지가 공개되었고 나는 채점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총 다섯 과목, 100 문항을 나는 거침없이 채점해나갔다. 한 과목을 채점할 때마다 나는 점수를 외쳤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소리 지르시며 기뻐하셨다.
불효자 녀석이 몇 년 만에 효도 비슷한 걸 해본 기분이었다. 그렇게 나는 내 예상보다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체력과 면접시험이 남아있었기에 긴장의 끊을 놓을 수 없었다. 겸허한 마음으로 체력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험생 기간 동안 스트레스를 먹는 것으로밖에 풀 수 없던 내 몸무게는 30kg 가까이 불어 있었고 그 무거운 몸뚱이를 이끌고 체력 훈련을 한다는 것이 여간 쉬운 문제는 아니었다. 다행히 체력 시험까지 한 달 반 여 간의 시간이 있었기에 나름의 위기의식 속에서도 여유롭게 준비를 할 수 있었고 체력 시험도 안정적으로 합격할 수 있었다.
체력 시험 당일 날 함께 시험장으로 향했던 형님은 중도 탈락해서 먼저 시험장 밖을 나섰다. 희비가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체력 시험을 통과하고 그 형님과는 서로 응원한다는 메시지를 나누고 나 홀로 쓸쓸하면서도 후련한 발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아찔했다. 내가 설령 방심해서 체력 시험 준비를 게을리하는 바람에 오늘 떨어지게 되었다면, 이 지옥 같았던 필기시험 준비를 1년 동안 다시 할 생각을 하니 집으로 걸어가면서 한두 번씩 다리가 풀리기도 했다.
나는 그 뒤로도 방심하지 않았다. 면접 스터디를 무려 3개나 하면서 면접 준비에 더욱 몰두했다. 자신감이 생겼다. 내가 떨어지게 된다면 여기 있는 대다수가 떨어질 것이다라는 확신이 생겼고, 면접날이 다가오게 되었다.
실제 면접은 생각보다 편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사기업처럼 심층 면접 방식이 아니다 보니 기본적인 질문들에 대해 상식 선에서 막힘없이 답변을 해나갔고, 체감상 5분쯤 지났을까? 하는 순간 30여 분 가량의 면접이라는 마지막 관문도 끝이 나게 되었다. 되레 아쉬웠다. 별의별 질문까지 다 준비해 갔던 터라 더 많은 것을 보여주지 못한 것에 미련이 남았었던 듯하다.
그렇게 마지막 관문까지 거치고 나니 마음에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때도 나는 안주하지 않았다. 재테크 공부를 본격적으로 해나가기 시작했다. 스물네 살의 나는 혈기가 넘쳤다. 남들보다 빠르게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된다면 이왕 이렇게 된 거 더 앞서 나가고 싶단 생각에 심취해있었다.
나는 대략적으로나마 이미 알고 있었다. 월급만으로는 절대로 내가 염원했던 안정적인 삶을 누리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알고 있었다. 남들 대다수가 접근하는 방식으로 주식 투자를 시작하게 된다면 나는 돈을 벌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투자 대가들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 유튜브에 있는 다양한 경제 관련 영상을 접하기 시작했다. 거인들의 어깨너머로 바라본 세상은 황홀하기 그지없었다. 정말 놀라웠던 점은 내 생각이 구루들의 생각들과 어느 정도 닮아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발견이었다.
머릿속에 있는 주식 투자에 대한 회의들을 하나둘씩 확신에 가까운 믿음으로 바꿔나가기 시작했다. 매일 밤 요동치는 심장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마음만은 벌써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다른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나는 다시 태어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0월 즈음, 나는 2021년도 교정직 공채에 최종 합격할 수 있었다. 코로나 사태의 여파로 연수원 교육은 기존보다 한 달 정도 단축되었다. 3주 간의 온라인 교육과 1주 간의 연수원 교육을 마쳤다. 이제 입직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그토록 원해왔던 연고지를 1순위 근무지로 선택할 수 있었는데, 온 세상이 나를 향해 어서 공직에 들어오라고 두 팔 벌려 환영하는 듯한 짜릿함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끝맺음 짓지 못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대학교를 자퇴하는 것. 그토록 염원했던 일이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대학교로 향했다. 입학하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을 투자했는데, 자퇴하는 것은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다소 과감스럽고 신중하지 못한 결정이라고 생각될 수 있겠지만 나는 확고했다. 나는 확고했다. 나는 확고했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나는 이 날만을 위해 살아왔다. 설령 직장이 내 적성에 맞지 않는다면? 나를 직장에 온전히 맞춰나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절대로 절대로 다시 대학교로 돌아갈 수 없었다. 나에겐 그럴 만큼의 여유로움이 없었다.
더 이상 대학생이라는 방패 뒤에 숨어서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당당하게 나 자신이 주가 되어 주체적인 삶을 살고 싶었다. 교수님께서 주신 과제보다는 나 자신의 존재 가치를 세상 앞에 증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일말의 아쉬움도, 미련도 없이 학교를 관둘 수 있었다.
자퇴서를 내러 갔던 날은 하늘마저도 내게 아쉬움을 표하는 것인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솔직히 나는 그렇게까지 확신했지만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자퇴를 한 지 1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도 여전히 이것은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다는 것을. 그렇게 나는 신입생 때 걸었던 학교 캠퍼스의 낭만을 가슴속에 고이 묻어두고 더 나은 내일을 위한 준비를 시작할 수 있었다.
나는 살아오면서 외부 환경 탓을 해왔던 적이 없었다. 언제나 답은 내 안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분명히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큰 결심을 하고 용기를 내어 최선의 노력을 실행해야 할 시기가 다가오기 마련이다. 나는 비록 수험생 시절을 돌이켜봤을 때 내가 무너졌던 기억들만 떠오르지만, 그래도 내 나름대로 열과 성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한창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가득 차 있던 시기에 친한 친구가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박수받고 살던 놈이 왜 박수 치고 있냐고."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승부욕이 강했던 나를 알던 그 친구가 꺼낸 말의 파편들이 내 살갗을 파고들었다. 그 말은 내가 공무원 시험 준비를 시작함에 있어 큰 영향력을 끼쳤다.
그 후 1년이 지나고 나는 다시 주변으로부터 박수받을 수 있었다. 눈물겨운 순간이었다. 성취감은 마치 마약과도 같아서 중독성이 강한 듯했다. 잊고 살았던 내 모습이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고 횡보장을 거듭하며 음의 복리로 녹아내리고 있던 내 인생 곡선은 다시 우상향 해나 갈 수 있었다.
내 스무 살부터의 인생을 요약해보자면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대학교 1학년을 마친 뒤 짧은 머리를 어색해하던 군 입대를 앞둔 스물 하나.
뭐든 할 수 있을 것이란 마음을 품고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온 스물둘.
본질적인 문제로부터 계속해서 도망 다니며 주눅 들어있던 스물셋.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어 용기를 내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게 된 스물넷.
치열했던 1년을 마치고 그토록 염원했던 취업 문제를 해결하게 된 스물다섯.
그래서 그런지 자우림의 스물다섯, 스물 하나라는 노래를 참 좋아한다. 음악의 힘은 놀라울 정도로 강렬하다.
처음 그 음악을 접했던 설렘, 그때 걸었던 거리, 그때 함께했던 사람들이 기억 퍼즐을 맞추듯이 하나둘씩 떠오른다. 스무 살부터 '스물다섯, 스물 하나'라는 노래를 참 좋아했는데, 그 덕분이었는지 내 인생도 스물다섯 즈음에 어느 정도의 방향성을 잡아나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이런 식의 얘기를 해준다. "그 시절은 다시 오지 않으니 무조건 즐겨라.", "그래도 한국에서 살아가려면 대학교 졸업장 정도는 있어야지...", "학비 생각에 부담 갖지 말고 마음 편히 학교를 다녀라." 등등...
나는 그럴 때마다 항상 반발심이 생겼다. 도대체 뭘 즐기라는 것일까? 나는 내 앞날을 생각하면 머리가 아파오고 위기의식부터 생기는데 그것은 이 고통마저도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감내해나가라는 의미였을까?
한 학기에 500만 원이 나간다. 거기다 내 생활비에 기숙사 거주비까지 포함하면 1년에 2천만 원은 우습게 나가는데, 나와도 전공을 살릴 수 있을까 말까 하는 불투명한 방향성에 우리 부모님 노후 자금까지 건들고 싶지 않았다.
가고 싶었던 학과도 없었다. 몇 천만 원의 등록금과 몇 년의 시간을 투자하면서까지 하고 싶은 공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마음 편하고 쉬운 말로 하고 싶은 공부를 억지로 찾아내어 의미를 부여할 만큼의 현실적인 여유 따위는 없었다. 나는 실용적인 삶을 추구하였기에, 그것은 결코 책상머리에 앉아서 공부하며 이상적인 세상을 음미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학교에서 배운 것은 딱 하나뿐이었다. 그것은 '주체적인 삶을 계획하고 실천해나가는 것' 그것만이라도 1년 치 등록금을 내면서 깨칠 수 있는 진리였다면 참으로 감사할 따름이다. 더 이상의 시간 낭비를 하지 않고 주체적인 내 삶을 계획하여 실행해나갈 수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나는 사람들의 실체 없는 말들을 뒤로한 채 나만의 길을 걸어가기로 다짐했고, 남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고 꿋꿋하게 내 길을 걸어가고 있는 중이다. 후회 따위는 없다. 오직 만족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세상이 정해주는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가이드라인을 벗어나는 것은 내게 주어진 제1 순위의 과제였기 때문에.
그렇게 올해 9월, 대학생 때 가장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대기업에 취직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축하의 의미에서 우리의 시작점이었던 대학교에서 재회하기로 약속한다.
해질 무렵의 대학교 풍경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우리 둘 다 금의환향하는 마음으로 대학교로 다시 돌아와서 서로를 축하하며 반가운 마음에 술잔을 기울였다.
약간의 취기가 올라왔다. 우리는 다시 캠퍼스로 향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6년 전, 1학년 2학기 기말고사를 보던 그 건물 앞으로 와서 나는 많은 생각에 잠긴다.
내가 만약 용기 내지 못했더라면, 아무 생각 없이 남들 다 하는 대로 걸어갔더라면, 선택과 집중을 하지 못했더라면, 세상이 정해주는 가이드라인을 벗어나지 못했더라면 난 아직도 이곳에서 공부하고 있었겠지...
이런 게 바로 대학생 감성이 아닐까. 기숙사 앞에 있는 자주 갔던 편의점에서 6년 만에 돌아와서
시원한 맥주 한 캔을 마시며 그 시절을 회상해본다. 백번 천 번 생각해봐도 나는 확고하다.
그때 내가 내린 결정은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음을.
그렇게 2021년 11월 29일, 내 첫 직장 생활은 시작되었다. 너무나도 감사한 마음뿐이었다.
그리고 2022년이 되었고, 나는 직장인에서 머물지 않고 투자자가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그렇게 2022년 말이 되었고, 3월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운영해나가고 있는 블로그를 되돌아보면서
내 삶의 이야기들과 투자에 대한 여러 생각들을 책으로까지 풀어내 보고자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 삶의 원동력은 언제나 위기의식이었다. 여기서 머물면 안 된다는 강박증이 있었던 탓일까? 계속해서
어떻게 하면 나같이 부족한 사람도 평범해질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많은 시간을 보내왔다. 그러다 보니 내가 해야 될 일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것들을 하나둘씩 실천해나가다 보니 내 나름대로의 기준선에 부합하는 평범함의 영역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자 어떻게 하면 나 같은 평범한 사람도 비범함의 영역에 도달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투자를 시작한 것도, 블로그를 시작한 것도, 직장에 계신 작가 선배님의 말씀을 듣고 카카오 브런치를 시작하며 작가의 꿈을 꾸기 시작하게 된 것도 모두 동일한 이유에서였다.
끊임없이 더 나은 미래를 고민하며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고 싶었고, 세상을 확률적으로 접근함으로써 내 사고의 불완전성에 대한 부분을 회의로서 확장시킬 수 있었다. 그렇게 내 사고가 확장되는 과정을 글로써 녹여내 보고 싶었다.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세상으로부터 내 존재 가치를 증명해보고 싶어서 더 큰 목소리로 나를 표현해내고 싶었다.
내 장점은 꾸준함이다. 앞으로도 나는 변함없이 내 성공을 향한 발자취들을 끊임없이 꾸준하게 남겨나가보고 싶다. 그렇게 내가 세상 밖으로 내놓는 역작들이 먼 미래에 나에게 엄청난 자산으로 돌아올 것이란 생각을 한다. 고등학교 수학 시간에 배운 복리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내 삶에 적용시켜보고자 한다. 그것들이 누적되었을 때 발휘하는 힘을 믿는다.
그렇게 나는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내가 서있는 이 땅, 대한민국 위에서 당당히 고졸로서 살기를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