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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태식 Nov 11. 2022

그렇게 나는 고졸로 살기를 선택했다. - 1편.

주체적인 삶에 대한 아름다움.

어린 시절부터 나에게는 꿈이 없었다. 누구는 대통령, 누구는 축구 선수, 누구는 연예인이 되고 싶다고들 하던데 나에게는 그렇게 흔하디 흔한 꿈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고등학생이 되면서 주변 친구들의 이상적인 꿈들이 현실적인 장래 희망으로 변모해가는 것을 지켜볼 수 있었다.


어느 대학교의 어느 학과를 가서 졸업 후 어떤 기업에 취업해야겠다는 것이 그 예시들이었다. 여전히 꿈이 없던 나는 고등학교 2학년 진학을 앞두고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여러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니, 문과는 취업이 어렵다는 얘기가 들린다. 그래서 그나마 선택의 폭이 넓은 이과에 진학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란 생각을 하였다. 오히려 그 당시 내게는 꿈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 삶의 초점도 자연스럽게 이상보다 현실에 더 무게를 둘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그 당시에도 글쓰기와 사색하기를 좋아하던 나는 이과로 진학한 후에 흥미도 없던 과학, 수학 과목 공부에 힘을 쏟았다. 다행히도 성적은 나쁘지 않았고, 잘만 유지하면 그래도 대학은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어볼 수 있었다. 하지만, 2학년 말쯤에 또 한 번의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향후 어떤 학과를 진학해야 할지를 결정했어야 됐는데, 도무지 가고 싶었던 곳이 없었던 것이다. 과학 공부에 너무나도 흥미가 없던 내게 도저히 일반 공대를 진학하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았었다. 그렇게 고민 끝에 그나마 수학과 과학 비중이 덜하다고 알려진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2016년, 나는 단국대학교 소프트웨어학과 신입생으로 입학하게 되었다. 선생님들도 부모님도 주변 사람들도 일단 대학부터 가야 한다라는 말 뿐이었고, 고등학생이었던 당시 내 입장에서도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12년의 세월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대학 진학밖에 없다는 생각에 대학 진학을 다짐하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현실은 냉정했다. 타자 조금 빠르고 수학이나 과학 공부하기 싫어하던 내가 도망치듯이 기계적으로 진로를 결정하여 진학한 컴퓨터 공학 학과 공부는 생전 들어본 적도 없는 학문의 연속이었다. 괴로움이 밀려들었다. "내가 과연 전공을 살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내신 공부처럼 열심히 암기만 하면 괜찮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던 고등학교 때와 완전히 다른 세상이 내 앞에 펼쳐졌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라는 말이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나는 방황하기 시작했다. 수동적으로 주어진 대로만 열심히 해나 가기만 해도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던 이전 세월과 달리, 온전히 내가 주체가 되어 내 삶을 책임져야겠다는 생각을 대학교 진학을 통해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아마 대학 진학을 통해서 가장 크게 배운 부분이 아닐까 지금 와서야 생각해본다.


그렇게 나는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군 입대를 하게 된다. 군대 생활은 나름대로 적성에 잘 맞았다. 시키는 일만 열심히 하고 정해진 시간에 밥을 먹고, 일과를 보낸 뒤에는 개인 정비 시간을 가지고 잠을 자면 하루가 끝났다. 무엇보다 진로에 대한 고민을 이 공간 속에서는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렇게 나는 군인이라는 신분을 핑계로 마음 편히 현실로부터 도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행복이나 안정감이 일시적일 것이란 생각은 전역이 가까워질수록 커져만 갔다. 잠시나마 직업 군인도 생각해보았으나 무슨 자신감에서였는지 전역만 하고 보면 일단 다른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란 기대감으로 직업 군인을 포기하고 나는 다시 사회로 나오게 되었다.


변한 것은 없었다. 그저 몸이 조금 다부져지고 나이만 두 살 더 먹은 나일뿐이었다. 그때 느꼈다. 우리가 흔히 '군인 아저씨'라고 불렀던 사람들은 사실 이십 대 초중반의 새파란 청년들이었음을. 나는 이 상태로 복학을 했다가는 신입생 때와 똑같은 삶을 반복하게 될까 봐 휴학을 결정했다.


휴학을 내고 일단 서울로 컴퓨터 학원을 다녀본다. 여전히 흥미가 없었다. 점차 출석률이 저조해지기 시작한다. 나는 계속해서 현실로부터 도망친다. 자괴감이 커질수록 자존감은 낮아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렇게 된 거 내 밥벌이라도 해보자며 아르바이트를 구해본다. 


친한 친구 녀석과 함께 택배 상하차 공장에서 하루 3~4시간 정도 짧게 일을 했다. 처음으로 내 수중에 쓸만한 돈이 생겼다. 그렇게 퇴근 후에는 친구와 술잔을 기울인다. 그러면 다음 날이 힘들었고 자연스럽게 학원도 가지 않고 잠만 자다가 다시 일을 나가고, 퇴근 후에는 또 그 친구와 함께 인생이란 뭘까?를 고민하며 술잔을 기울인다. 


그 뒤로도 나는 계속해서 현실로부터 도망친다. 그 맛은 달콤했다. 당장 내 수중에 돈이 들어오기 때문이었다. 더 긴 시간대의 아르바이트를 찾아 나선다. 그렇게 우리 집 근처에 있는 편의점에서 일을 하게 된다. 매장의 규모가 큰 만큼 손님이 많았기에 다소 바빴지만, 땀 흘리며 일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노동의 신성한 가치가 이런 것인가?를 생각해보며 나는 열심히 움직이고 하루 일과를 마무리한다.


그렇게 다니던 학원은 완전히 끊어버렸고, 일에 집중하기로 다짐한다. 업무에 공백이 발생할 때마다 점장님으로부터 연락이 왔고, 나는 한 번의 거절도 없이 나가서 근무를 한다. 일당 환원주의의 노예가 된 기분이었지만 그렇게라도 무언가에 몰두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 소리 없이 밀려드는 공허함을 도저히 채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라도 내 존재 가치를 증명하지 않는다면 내가 너무 비참해진다는 것을 알았기에 내가 주가 되어서 근무자 교육 자료를 만들고 새로운 직원들 교육도 담당하게 된다. 그러다 문득 "어쩌면 이대로 살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복학 시기가 다가왔다. 하지만 나는 더 도망칠 곳이 없었단 것을 깨닫고 복학을 하게 된다. 비참했다. 나이는 스물넷이 됐는데 도대체 나는 무얼 한 걸까? 학과 공부를 해보겠다는 핑계로 휴학을 내고 1년 동안 도망만 쳤다는 사실에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였던지라 수업은 비대면으로 진행되었다. 어느 날 카페에서 수업을 듣고 있던 나는 문득 노트북을 덮어버리고 카페에서 뛰어나온다. 더 이상은 도망치면 안 되겠다는 경각심이 나를 움직였던 것 같다. 이렇게 수동적으로 살아서는 답이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으니까.


그렇게 내 삶의 방향성을 생각해보았다. 그것은 안정성이었다. 사실은 예전부터 안정적인 직업을 갖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공무원 준비를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현실적인 고민 끝에 교정직으로 직렬을 정하게 된다. 주변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나는 2020년 5월, 교도관 준비를 시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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