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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태식 Nov 13. 2022

진정한 가난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물질보다 정신

나는 최대한 많은 사람들과 여러 의견을

주고받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일반적으로 대화를 나눌 때 의식적인

부분에 대한 주제로 대화를 주도하는 편이다.

그렇기에 그 사람이 어떤 성향을 가졌는가,

어떤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가,

현재 우리가 당면한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향후 방향성은 어떤지에 대한

얘기들이 대화의 주가 된다.


그렇게 내가 생각해본 적조차 없는 새로운

관점을 접할 때마다 이렇게 기록해두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라 오늘도 글을 남겨보고자 한다.                                          


나는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공통적인 것은 내 주위를 둘러보면서 직접적

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얘기를 듣다 보면,


그간 여러 시행착오를 겪은 사람도 있고,

계속해서 좋은 성과를 거두는 사람도 있고,

계속해서 실패를 거듭하는 사람들로 그룹을

나눠볼 수 있게 된다.


그 과정에서 계속해서 시행착오를 겪었다거나

실패했던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다 뚜렷하게

두드러지는 공통점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오늘 글에서는 이 공통점에 대해서 내 나름대로

의 의견을 제시해보고, 어떻게 하면 이 부분을

보완해나갈 수 있는지를 논하는 방향으로 글을

녹여내 보도록 하겠다.


첫 번째로는 자신의 실패 원인을 자꾸 외부에서

찾으려고 하는 그들 특유의 방어 기제였다.          

                                                                                                                         

자신들의 실패 원인이 무엇인지를 되돌아보고

그를 찾아서 계속해서 보완해나갈 생각을 해야

하는데,


그 원인을 자꾸 외부로 돌리다 보니,

"이번에는 분명 다를 거야.", "그땐 그것 때문에

내가 실패한 거지."라고 치부해버린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실패의 본질은

왜곡되고 개인의 정신적 발전이 일어날 수

없는 폐쇄된 뇌구조를 스스로 장착함으로써

본인의 발전을 막게 되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내 입장에서는 앞으로 그들이 본질적인

내면의 문제를 해결해나가지 않고 새로운

무언가를 자꾸 시도한다고 해서,


설령 운이 좋아서, 노력을 열심히 해서

나름의 성공을 거두었다고 해도 그것이

과연 진짜 성공인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것은 사실 반 쪽짜리 성공은 아니었을까?

그 성공이 오히려 스스로에 대한 과잉 확신을

불러일으켜서 무리하게 더 큰 규모의 일을

벌이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서


향후 자신이 더 크게 무너지게 될 원인을

만드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내가 정말 정말 무서웠던 것은 진정한

자신의 문제가 뭔지도 모른 채 얄팍한

지식으로 그들 스스로가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한 태도였다.


두 번째는 자의식 과잉이 강해서 융통성

이라는 덕목이 경직된 그들의 태도였다.


사실 첫 번째 부분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결함이라고 생각한다. 자의식 과잉이 강하고

융통성이 부족하니까 실패 원인을 자꾸 외부

에서 찾으려고 하지 않았을까?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나가고자 하는 그들

의 태도는 분명 본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분명 그것은 본인 스스로를 외골수의

길로 밀어 넣을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들

과 대화를 나눠보고, 자신이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를 파악해나가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그런 시도를 하지 않는다.

자신에 대한 확신이 과한 것인지, 나름대로

의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인지 그 원인은

정확히 모르지만, 항상 이번에는 다르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땐 내가 어렸어.", "그땐... 등의 이유가

있었고, 지금은 달라."라는 태도로 일관한다.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다. 과연 당신은 그때

이후로 구체적으로 뭐가 어떻게 변했는지에

대해서.


스무 살이 넘었으면 그건 과연 어른일까?

마흔 살이 넘었다고 그건 과연 어른일까?


내가 점차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느껴지는 것은, 나이 따위가 그 사람의

정신적 성숙함과 지혜를 대변해주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내가 받아들인

상식들이 고착화될 확률이 높아진다는 의미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기에 자고로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은 성찰과

자신의 생각에 대한 잘못된 믿음을 아주 쉽게

부숴버릴 수 있는 융통성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나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어봐도 좀처럼 그런 사람들을

찾는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많이 느꼈다.


놀라웠다. 정말 저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어떻게 자신을 돌아볼 생각을 하지도 않고

살아왔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그래서 나는 내 나름대로는 이렇게 정의 내려

보고 싶다. 어른이라는 것은 현실과 바람을

구별할 줄 아는 자세를 가진 이라고.


사람들은 누구나 평화를 추구하고, 서로

대립하며 경쟁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즉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유를 원할 것이다.


 하지만 그 자유라는 것은 그들의 바람대로

"우리 모두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냅시다."

하고 얻어지는 바람의 산물이 아니다.


자유라는 것의 기본 가치는 본인이 선택한

길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기꺼이 인내하는

자세에서부터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꺼이 나 스스로가

부강해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말로만 평화,

평화를 외친다고 거저 얻어지는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인지하고 있지

않은가?


그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과감하게 내

생각을 표출할 줄도 알아야 하고, 결단력

있게 행동할 줄도 알아야 하고, 필요하면

세상과 싸울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세상에는 이런 기본적인 가치도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요즘 들어

너무나도 많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 대한민국 헌법 상에 기재되어 있듯이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이지 않은가?

자유가 민주주의 앞에 붙어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핵심 가치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럼 그 핵심 가치인 자유를 무엇을 통해서

이뤄낼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


바로 자유 뒤에 붙어있는 민주주의, 민주주의

이지 않겠는가? 따라서, 자유민주주의라는

것은,


민주주의라는 수단을 통해서 자유라는 핵심

가치를 이뤄나가겠다는 방향성이 아니겠냐는

생각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미 스무 살이 넘은 성인

이라면, 과연 스스로가 어른이라고 불릴 만큼

정신적인 성숙과 융통성을 가졌는지를 끊임

없이 회의해보고 성찰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서 우리 스스로가 과연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으로서의 사고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검토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편협한 시야와 자의식 과잉에 빠져

다양한 해석을 틀어막고, 여러 당면한 문제들을

그저 "좋게 좋게 생각하자~"하면서 회피하는

것이 과연 자유민주주의의 국민으로서 할 수

있는 타당한 자세인지를 검토해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따라서,

다양한 해석을 틀어막고, 자신의 길이 옳다고

과잉 확신을 하고 문제의 원인을 자꾸 외부로

돌리고,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한 책임과 의무

를 온전히 하지 않는 사람이 스스로의 인생에서

성공한다?


내 입장에서는 납득하기가 어렵다.

정작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자꾸 이것저것

시도해보는 것이 아닌 삶에 대한 방향성

검토와 자신에 대한 성찰이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삶을 다루는 접근법 자체가 잘못되었는데,

백날 "사람은 경험이 중요해!" 하면서 이것저것

시도해본다고 해서 무슨 실익이 있겠는가?


마지막은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는

그들의 태도였다.


그들의 태도는 좁게 보면 주식 투자를 통해서

도 나타난다.


그들은 심지어 알고 있다. 은행에다 예적금을

넣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주식이나 코인을 대할 때 그들은

정말 놀랍게도 이분법적 태도를 벗어나지

못한다.


더 놀라운 점은,

"주식은 한탕이지", "쟤도 코인으로 돈 좀

만졌다는데 나도 한 번?", "인생 뭐 별 거

있냐?" 등의 굉장히 굉장히 모 아니면 도

식의 스스로 큰 리스크조차 아무렇지 않게

견뎌내려고 하는 그들의 이분법적 태도였다.


답답한 것은 그들의 태도가 너무 극단적인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는 것이었다.


예적금이 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면,

어떻게 하면 내가 장기적으로 물가 상승률

보다 높은 자산군에 투자해서 돈을 굴릴까?


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어떻게 하면 내 미래

삶을 지금보다 조금 더 풍요롭게 바꿀 수 있을

지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고 한 단계, 한 단계씩

차근차근히 단계를 밟아나가며 사고를 넓힐

줄 알아야 하는데, 단기 이익 추종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바로 앞만 내다보고 멀리 내다볼 생각을

하지 못한다.


넓게 보면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는 인생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어떠한 의사 결정을 할 때, 위험을 감수하려는

대담성까진 그들이 가질 수 있어도, 그 위험이

내 눈앞에 닥쳤을 때에 다가오는 두려움에 대처

하는 방식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니 그들은 계속해서 자기 스스로 리스크가

큰 방향으로 인생을 배팅하고, 스스로 그 모든

짐을 짊어지려 하는 극단적인 경향이 있다.


그들이 한 단계, 한 단계씩 꾸준히 성장해나가는

삶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생각해

보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생긴다.


이는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그에 맞춰서

수동적으로 살라는 얘기가 전혀 아니다.


미리 위기의식을 가지고 대비해서 향후

내가 접하게 될 다양한 리스크들을 조금이라도

줄여야 인생에 큰 갈림길 속에서도 방황하지

않고 앞서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한 단계, 한 단계씩 꾸준히, 장기적

으로 앞서 나간다면 자연스럽게 열등했던

자신에서 평범한 자신으로, 평범했던 자신에서

비범한 자신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실패를 해보는 것이 중요할 순 있겠다.

하지만 미리 실패에 대해 대비함으로써,

굳이 실패했을 때 얻을 교훈을 실패하지

않고도 얻어나가는 자세도 나름대로 바람직

하지 않은가 생각해본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세상을 이분법

적으로 보는 것이 아닌, 확률적으로 바라볼

줄 아는 시야를 가졌으면 좋겠다는 나름의

조언을 조심스럽게 건네보고 싶다.


확률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이나 의사 결정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자신 생각에 대한 불 완정 성에 대한

긍정 자세를 내포하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확률적으로 세상을 접근할수록

나의 부족함을 계속해서 찾고 보완해나갈

확률이 자연스럽게 높아지지 않을까?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성공에 다가설 확률

도 높아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런 자세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나를 비판해주는 사람들에게 감정적으로

화를 내기보다는 되레 기뻐하며 깨달음을

전달해줘서 고맙다는 긍정적인 자세를

보이게 되지 않을까?


내 감정이 뭐가 중요할까? 그깟 백지 수표

한 장보다 얇을 자존심? 그런 게 뭐가 중요할까


내면의 가치와 정신적 성숙함으로 자신을

채워나간다면 그깟 무릎 백 번도 아무렇지

않게 꿇지 않겠는가?


그래서 정말 중요한 것은 내 알랑한 감정에

이끌려가는 자존심보다 본인 스스로에 대한

높은 자존감을 갖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만큼 세상을 감정적으로 바라보는 것과

세상을 이성적으로 냉철하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미래 격차는,


아무리 세상이 불공평하고 여러 성공들이

운에 의해서 좌우된다고 하더라도, 그 격차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엄청난 수준으로 벌어져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무슨 노력이 중요할까? 노력은 디폴트인데.

노력보다 중요한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접근법

, 그리고 그 접근법을 강력한 의지와 실행력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추진력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무슨 균형이 중요하겠는가?

내가 어느 방향을 향해 날아가고 있느냐가

중요하지. 이쪽으로 조금, 저쪽으로 조금 그렇게

균형 논리에 휩싸여서 애매한 곳으로 나아간다면

도착하게 될 목적지가 도대체 어디일까?


그래서 이번 글의 제목처럼 진정한 가난은,

물질이 아닌 정신에서부터 비롯된다는 생각이다.


그들 특유의 자신의 한계부터 정해버리는 태도,

다른 사람의 의견을 제대로 들어보려고 하지도

않는 편협한 자세, 자신에 대한 과잉 확신,

세상을 이분법 적으로 바라보는 자세들이

가난을 만들어내는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바꿔 말하면 그것들부터 깨부술 줄 알아야

가난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라는 가치에 대해

온전히 알고,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풍요로워질 것이라는 생각이다.                                              


                                   

해당 캡처본은 일본의 1980년대 거품 경제

당시에 부동산 사업으로 성공했다가,

거품이 꺼지자 막대한 빚더미를 떠안게 된 고즈마

노부타카 씨의 발언을 가져온 것이다.


(출처 : https://www.youtube.com/watch?v=-D7GIBs8QAU)


영상을 보면서 정말 섬뜩했던 것은, 한창

일본 경제가 거품의 절정이었던 시기에도

은행과 사업가, 국민들 대다수가 그 거품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만큼 세상을 바라보는 접근법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새삼스럽게 다시 얻을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세상을 항상 확률적으로 바라보는 시야를

통해서 향후 내게 닥칠 수 있는 리스크들을

계속해서 줄여나가도록 노력하는 자세가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선 위기의식이 필요하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들도 얼마든지 수용할

줄 아는 융통성이 필요하고, 자신이 모르는

것을 기꺼이, 당당히 모른다고 할 줄 아는

높은 자존감이 필요할 것이다.


굳이 우리는 실패의 순간을 맞닥뜨리지

않더라도 미리 대비함으로써 그 실패

요인을 사전에 제거할 수 있는 지능이

있는 생물이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그것을 실천해나가는 것만이

내 위치에서 내릴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일

것이란 생각이다.


물질적인 부를 추구하기에 앞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정신적 가난을

벗어나도록 노력하는 태도가 현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가치가

아닐까?라는 말을 끝으로 글을 줄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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