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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anius May 22. 2024

가장 중요한 건 제 의지와 자세죠

What  matters  is my will and attitude.

다시 외국인

미국에서의 15년이라는 긴 외국인 생활을 마무리하고 2016년도에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그 시간 동안 나의 생각과 언어를 포함한 많은 부분들이 미국생활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다시 '외국인'이 된 기분이었다. 미국에서 생활하는 이민자들도 마찬가지이지만 한국에서 생활하는 사람들도 누군가 미국 생활을 하다가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면 보편적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미국 생활이 어려웠나 보다."

"저런... 미국 생활에 적응을 못했나 보네."

왜 한국으로 돌아가는 거래...?

박사과정 인터뷰 보러 방문한 한국과학기술원

나 또한 이런 질문을 정말 많이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다. 이유는 간단했다. 한국에 돌아가야 할 이유가 생겼기 때문. 나의 연구에 대한 갈증을 해소해 줄 만한, 5-6년을 박사과정생으로 발목이 묶여있어도 행복할 만큼의 연구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게 2015년 3월 경이었고, 해당 연구실에 이메일로 컨택을 해서 교수님과 당시 스카이프(Skype)라는 화상 프로그램으로 1차 면접을 보았다. 5월에는 내가 재학 중이던 남가주대학(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6월에 내가 컨택했던 교수님께서 계신 대학원에 입학 지원서를 냈고 7월에 서류심사 합격이 되었다. 당시에 나는 임신 중이었지만 박사로서 공부와 연구를 계속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니 일이 순차적으로 빠르게 진행이 되었다. 그해 8월, 박사학위 과정 심사를 위한 2차 대면 면접도 날짜가 잡혔고 같은 시기에 나의 첫째 아이가 태어났다. 대면 면접은 한국으로 귀국하여서 치러야 했기 때문에 당시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작고 소중한 첫 아이를 남편과 시어머니께 맡기고 출산 후 10일 만에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와야만 했다. 그렇게 도착한 면접 장소는 대전에 위치한 한국과학기술원, 카이스트였다.


To start a new chapter of my life..

내 삶의 새로운 장인 박사과정을 시작하기 위해 인터뷰를 치러야 했다. 이 날 면접에서 몇 교수님들께서도 나에게 비슷한 질문을 하셨다.


"한국에 왜 돌아와서 박사과정을 하려는 겁니까?"

"보통 미국으로 박사과정을 하러 가지 않나?"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진학할 고등학교를 결정할 때 내가 겪었던, 아주 다르지만 비슷한 딜레마가 떠오른다.




나의 중학교 생활이 마무리되어 갈 때쯤 나는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Bravo Medical Magnet High School(이하 브라보)이라는 Los Angeles에서 교육적인 측면에서 유명한 고등학교에 입학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메디컬 매그넷 고등학교는 한국의 과학고와 같은 과학이 특성화되어 있는 특목고(특수목적고등학교) 중 하나이다. 학교 이름 그대로 의대의 진학을 꿈꾸는 고등학생들에게 혹은 그들의 부모들에게 'medical high school'은 좋은 기회였다. 이름 그대로 '브라보'였다. 어쩌면 나의 부모님이 나를 통해 꿈꾸셨던 의사가, 혹은 나의 꿈인 과학자가 되기 위한 지름길이라고 생각이 됐다. 물론 의과학 고등학교를 나온다고 미국에서 의대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래와 같은 많은 혜택들이 있었다.


1. 브라보는 당시 Los Angeles district에서 고등학교 랭크 4위이고, 가주교육구에서 목표로 하는 API(Academic Performance Index) 지수 800을 훌쩍 넘은 850에 가까운 점수를 가지고 있다.

2. 캘리포니아 주 상위 10% 안에 드는 학교에게 주어진다는 The Blue Ribbon award를 수상할 정도로 학생들의 학업성취도가 우수한 학교이다.

3. 대학교 입시과목인 AP(Advanced Placement) 과목들을 다양하게 제공한다.

4. 주위에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USC) 메디컬센터도 위치해 있고 인턴쉽등 다양한 혜택을 제공한다고 한다.

5. 이 외에도 다양한 봉사활동, 교과 외 활동(extra curricular activity)들을 학생들에게 제공함으로써 보다 더 좋은 대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 준다.

6. 국립 고등학교임에도 불구하고 1명의 선생님이 가르치는 학생 비율이 사립 고등학교와 같이 작은 편이다.

브라보는 현재 미국 전체 상위 4% 안에 드는 고등학교이자 로스앤젤레스 1위 공립 고등학교이다.


내가 이 학교에 진학하지 않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입학 전 학교를 투어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 학교를 방문하게 되었고 내가 이 학교에 진학하지 못할 이유가 여럿 생겨버렸다. 가장 우선적으로 거리였다. 당시 내가 살고 있던 거주지와 거리가 있었지만 브라보에서는 스쿨버스를 제공하고 있었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진 않는다. 하지만 '만약에' 내가 아침에 스쿨버스를 놓친다면이 문제였다. 당시에 동생이 이미 먼 곳으로 학교를 통학 중이었고 몇 번 정류장에 늦게 도착하여 엄마가 동생을 데려다주고 출근을 힘겹게 하시는 모습을 지켜봤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금전적인 문제였다. 브라보는 학생들에게 많은 경험과 혜택을 줄 수 있는 그런 학교였다. 하지만 그만큼의 경험과 혜택을 받으려면 부모들의 금적전인 희생도 무시를 못하는 부분이었다. 처음으로 그것도 미국에 도착한 지 2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추천서와 입학허가서를 받았지만 학교를 투어 한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서 좋은 기회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께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집에서 내가 버스로 통학할 수 있는 거리의 비교적 가까운 Belmont High School(이하 벨몬트)라는 학교에 입학하기로 결정했다. 벨몬트는 당시 API 지수가 800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520점이었, 4,000명이 넘는 전교생 중 2,200 이상이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학생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학생 drop-out(중퇴) 비율이 65%가 넘었으며, 로스앤젤레스 고등학교 전체 하위 96% 미만인 이른바 '문제아들의 학교'로 불렸다. 하지만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에게 이런 상황들은 사소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목표만 뚜렷하고 그것을 이뤄내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되지!

그렇게 마음을 먹으니 내 상황들이 긍정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 뭐 까짓 거 내가 일등 해버리지, 뭐!' 

'봉사활동, 교외 활동들은 내가 직접 찾아다니면 되지, 뭐!' 

'대학교 입시과목들도 내가 공부해서 시험보지, 뭐!'


그해 7월에 벨몬트에 입학하였고 내가 말했던 것들을 하나씩 해내가기 시작했다. 당시 학교에 학생 수가 너무 많아 세 트랙으로 나누어 학기를 운영하는 year-round제도가 취약점이었는데, 이것을 나는 혜택으로 이용했다. 학기 중간중간이 몇 달씩 비는 intersession 기간이 있었는데 그 기간에도 수업을 들어서 점수를 채워나갔다. English as Second Language(ESL) 수업들로 다른 아이들보다 뒤처져있던 수업 진도속도는 그렇게 따라잡아갔고 9학년때는 수학 반학기 월반 제의도 받았었다. 기초의 중요성을 알고 있던 나는 모든 수업을 차근차근 들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교과 진행속도는 물론 성적도 다른 아이들을 앞서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3년 차인 11학년에는 대학 입시과목 중 하나인 AP Calculus(미적분학) 시험을 5점 만점 받으며 대학교 수학교과 점수를 미리 획득할 수 있었다. 11학년 입시준비가 끝난 후인 12학년에도 나는 느슨할 수 없었다. 항상 열심인 나의 모습을 보고 도움의 손길이 생기기 시작했다. 벨몬트에서는 2년 차 미적분학 수업을 제공하지 않았고, 나를 기특하게 여긴 당시 나의 11학년 수학선생님의 도움으로 근처 2년제 대학인 Los Angeles Community College(LACC)에서 같이 수업을 들었고, 독학으로 시험준비도 하여 대학생활을 계속 준비해 나갈 수 있었다. 모두가 취약점이라고 했던 것들이 정말 '사소한 것'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학생, 왜 한국에 돌아와서 박사과정을 하려는 겁니까?"


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여러 상황들과 이유가 있겠지만 위치가 뭐가 중요하겠어요. 가장 중요한 건 제 의지와 자세죠. 제가 하고 싶은 연구가 있고 그게 여기, 카이스트에서 가능합니다."


그렇게 나의 두 번째 '외국인' 생활이 카이스트에서 박사과정으로 시작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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