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부터 나는 아이들에게 놀이 위주의 학원 외 사교육을 시키지 않았다. 공부는 집에서 학습지를 시켰고 학원은 태권도나 종이접기 교실 정도였다. 한 때는 잠깐 영어유치원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하루 정도 샘솓았었지만 이내 한국인으로서 한국어를 가장 먼저 능숙하게 잘해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에 교내 어린이집, 집 근처 유치원을 보냈었다. 유치원에 다니면서 일주일에 한두 번씩 영어 특별활동이 있었는데 그것만으로도 둘째는 곧 잘 따라 했고 발음도 몇 번 교정해 주니 능숙하게 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잘하고야 말겠다는 욕심 많은 아이였기 때문에 언어도 빨라서 영어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욕심만 많은 아이였던 나와는 다르게 똑순이였고 노력까지 하는 아이여서 주위에서도 똑똑하다고 칭찬을 많이 들어왔었다. 이런 언니를 둔 셋째는 말할 것도 없었다. 엄마에게 칭찬을 항상 받고 싶어 하던 둘째는 동생도 잘 돌봐주었다. 어떤 때는 그 아이가 오히려 더 엄마 같았다. 이런 언니를 둔 셋째는 더할 나위 없이 말도 빨랐고, 흡수하듯이 영어도 익히기 시작했다.
육아는 처음이라..
문제는 첫째였다. 아니, 모든 게 처음이었던 내가 문제였다. 첫째 아이를 출산하고 열흘 만에 한국으로 귀국하여 카이스트에서 박사과정을 위한 대면 면접을 치르고 입학허가를 받았다. 그때부터 15년의 미국생활을 정리하고, 6개월 만인 2016년 2월에 한국으로 다시 귀국하였다. 박사과정이 시작되면 내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6개월이 너무 소중했고 아이와 최대한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하였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지만 차근차근 배워간다고 생각하며 모유수유도 열심히 하고 책도 열심히 읽어주었다. 박사과정 준비도 같이해야 했었기 때문에 내가 하게 될 연구 관련 논문도 나 같이 공부할 겸 읽어주었다. 나는 둘째와 셋째 임신 중에도 영어로 된 성경책이나 논문들을 out loud(큰 소리)로 읽어주곤 했었다. 내심 아이들이 듣고 나중에 커서 이중 언어에 도움이 되길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내가 아이가 커가면서 신경 써주지 못하면 다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내가 대학원에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우리 가족은 대전역 근처에 집을 얻었다. 학교와 더 가까운 곳에 얻었으면 좋았겠지만 당시 신랑이 미국에서 다니고 있던 회사의 지사가 서울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아침마다 기차를 타고 출퇴근하는 그를 위해 대전역이 적당하였다. 나도 새벽에 출근하는 신랑을 위해 (매번 하지는 못 했지만) 아침을 챙겨주고 아이를 준비시켜 아침 일찍 8시쯤 집에서 나섰다. 20~30분이면 학교에 도착할 거리에 위치하였지만 출근시간이라 막히면 1시간 정도 걸리곤 했다. 다행히 학교 내에 어린이집이 있어서 아이를 맡기고 나도 연구실로 출근하였다. 그리고 6시에 퇴근하며 아이를 어린이집에서 데리고 부랴부랴 집에 도착하면 7시가 넘어있었다. 아이에게 이유식을 먹이고 나면 8시였다. 씻기고 재우기 전에 텔레비전에 아이가 좋아하는 동요가 나오는 프로그램을 틀어주었다. 그 시간이 오롯이 나의 휴식 시간이었다. 9시가 좀 넘으면 신랑이 서울에서 퇴근하여 집에 와서 같이 저녁을 먹었고 그 후에 아이를 씻기고 재웠다. 하지만 그 후에도 나의 일과는 끝이 나지 않았다. 아이가 7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원에서 낮잠 이외에도 차에서 이동하는 시간에 잠을 잤기 때문에 재우기도 쉽지 않았고 밤에 한두 번 깼었다. 당시 모유와 분유수유를 혼합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새벽에도 오롯이 육아는 나의 몫이었다. 한국에 오자마자 그런 루틴에 적응해야만 했고, 공부와 독박육아에 항상 지쳐있었지만 그것을 서울에서 대전까지 매일 출퇴근하는 신랑에게 내색할 순 없었다. 그래도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같이 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하루하루가 감사했고 그 정신력으로 버틸 수 있었던 것 같다.
20개월이 되었을 때 받은 영유아 검사 결과
첫 아이고 남자아이라 그저 느린 줄 알았다.
아이가 어릴 때만 해도 내가 나름 육아도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아이가 키가 작다' 혹은 '왜소하다'라는 고민을 가지고 있던 엄마들과 달리 내 아이는 다른 또래에 비해 영유아 검사를 해도 머리둘레, 키, 몸무게는 모두 또래보다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눈에 보이는 아이의 발달이 나의 육아에 대한 척도가 되었다. 육아가 처음인 나에게 왠지 모르게 '넌 잘하고 있다'라고 안심시켜 주는 나만의 엄마 성적표 같았다. 하지만 내가 간과하고 있던 것들이 있었다. 바로 보이지 않는 아이의 언어와 인지 능력이었다. 20개월이 지났을 무렵부터 '언어영역의 발달이 조금 늦은 편'이라는 소견을 받았지만 첫 아이이고 남자아이니 조금 느린 것이고 점점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잘못이라고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연구실에서 퇴근한 후 내 몸이 피곤하다는 이유로 아이에게 책 읽어주기 대신 텔레비전을 틀어주었다. 아이가 운다고 영상이 나오는 핸드폰을 쥐어주었다. 그렇게 아이의 인지와 언어능력은 성장 속도가 더딜 수밖에 없었고, 한 곳에서 차분하게 앉아있는 것을 어려워하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울기 바쁜 아이로 자라게 되었다. 그렇게 5살이 되었을 무렵 발달 검사를 받게 되었고 또래보다 인지와 언어 부분이 16개월이나 늦는다는 청천벽력 같은 결과를 받게 되었다. 다 내 탓 같았다.
'내가 옆에서 더 이야기를 많이 해주고 계속 말을 걸어줬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건데...'
'임신했을 때처럼 옆에서 계속 책을 읽어주고 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건데...'
나도 나름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지만 결과적으로 아이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친 것 같아서 미안하고 속상하여 항상 울면서 잠들었었다. 한 편으로는 아이가 아직 어려서 빨리 알게 된 것에 감사한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집 근처에 아이들 발달 센터가 있었고 어린이집을 마치면 이곳으로 데려와 언어 수업을 듣게 하였다. 소근육을 사용하는 놀이들이 언어와 인지에 좋다고 하여 놀이 수업과 함께 언어 인지 수업도 같이 하였고 더디지만 점점 나아지기 시작했다. 집에서도 손으로 하는 놀이가 좋다고 하여 나노블록을 같이 해보았는데 아이가 좋아하였다. 주위가 산만하던 아이가 오롯이 한 곳에 앉아있는 시간은 나노블록이라고 하는 조그만 레고로 로봇이나 캐릭터 모형을 만들 때뿐이었다. 그 집중력을 나노블록에서 한글놀이로, 한글놀이에서 학습지로, 한 단계씩 영역을 넓혀 나갔다.
지금은 아이들이 깨어 있는 한 나의 개인 시간은 허용되지 않는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양보다 질임을 너무나도 혹독하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집순이에다가 누가 나에게 말을 걸지 않는 이상 한마디도 안 하고 살 수 있는 I인 나지만, 아이들과의 시간은 최대한 의미 있게 사용하려고 주말에는 체험활동이든 박물관이든 무조건 밖으로 나가는 수다쟁이 엄마가 되었다. 퇴근 후 아무리 피곤하여도 아이들과 같이 숙제하고 아직 어린 셋째 아이와는 놀아준 뒤 모두가 잠든 후에 나마 나의 시간을 갖는다.
덕분에 내 첫 아픈 손가락, 첫째 아이는 잘 성장하고 있다. 지금은 초등학교 3학년, 10살이 되었고 시험을 100점 받으면 나에게 보상으로 라면을 끓여달라고 하고, 심심할 때는 영어를 사용하여 게임을 하는 것을 좋아하며, 학습지에서 배운 한자가 나오면 나에게 가르쳐 주는 똑똑한 아이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