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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vu letar Mar 20. 2023

이불에서 페이지까지

나는 보통 새벽에 글을 쓰려한다. 새벽 네시 반에 일어나서 주스나 우유를 마시고 양치 한 다음, 책상에 앉아서 쓰기 시작하는 것. 그러다 일곱 시가 다 되어갈 때 즈음 출근 준비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계획에 머물러있을 뿐. 나는 단 한 번도 네시 반에 일어난 이 없다. 현실에서는 눈을 떠보면 핸드폰은 충전기가 빠진 채 저 멀리 달아나 있고, 시간은 이미 여섯 시 사십 분. 화들짝 놀라 부리나케 영양제를 먹고 씻기 시작하는 것. 그게 내 아침이다.


나는 언제쯤 아침 일곱 시 정각에 발행 버튼을 누를 수 있을까.


그런데, 이것을 계속 고민해야 할까. 세상에는 읽을거리가 많고 글을 잘 쓰는 사람, 훌륭한 글이 너무나도 많은데. 나까지 보태야 하는 걸까. 컨디션 관리를 하고 평일엔 120분 더 일찍 일어나기 위해 알람을 맞추고 비틀대며 끄는 일. 결국은 성공하여 오전 일곱 시 발행을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는 누군가가 나의 글을 기다리고 있을까. 당장 멈추어도 이상하지 않을 이것을 나는 왜 자꾸 시도하는 것일까.


오늘도 새벽에 일어나지 못한 나는 회사에 출근해 전날 써둔 업무리스트를 체크하고 한 가지끝날 때마다 20분씩 짬을 내어 글을 쓴다. 점심시간도 쪼갠다. 총 3회 짬을 낼 수 있고, 운이 좋으면 4회. 그러면 어떤 글이든 초고를 완성할 수 있다. 그리고 퇴근 이후 씻고 집에서 다시 노트북을 켜- 묵혀둔 초고 중 하나를 골라 고치기 시작한다. 두 시간 동안 고친다. 그것을 마친 후 막간의 독서와 함께 잠들면, 다시 시계는 오전 여섯 시 사십 분.


시간을 끊어 자판을 치는 바람에 내 글은 어딘지 모르게 끊기는 분위기가 있고 그렇게 다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나는 그것이 마음에 들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전자는 의외성이 있다이고, 후자는 호흡이 가빠보인다는 점이다.

나는 지금보다 평화롭고 안정적인 글을 쓰길 원한다. 새벽 공원에 놓인 벤치처럼. 해 뜰 무렵 안개에 흔들리는 조경처럼. 평화롭지만 결코 구경거리가 없는 것이 아닌. 그런 글을.


그러려면 반드시 일어나야 하겠지.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않는 고요한 새벽시간에 써야 하겠지. 회사에서 짬을 낸다고 하지만 그건, 명백한 시간 도둑질이다. 웬만하면 더욱 떳떳하게 고 싶다. 그러나 이 고질적인 늦잠을 어떻게 할까. 새벽 네시 반. 내가 그 시간에 일어나는 건 꿈에서, 다시 꿈으로인 것을.


내가 글을 쓰는 데에 상당한 욕구가 있는 것을 내 주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회사 사람들 중 친분이 있는 몇몇은 내가 뭔가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그들이 목격한 내 글은 월 말에 제출하는 보고서가 전부이고. 퇴근 후 쓴다는 글이, '사실을 말하기 위한 허구' 또는 '허구를 말하기 위한 사실 가미'라는 걸 알았을 때, 꿈뻑꿈뻑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답도 없네, 하는 그 표정. 그들의 삶은 대부분 상상이 아닌 경험, 감성이 아닌 이성이 자신을 영위할 수 있도록. 그것이 잘 사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똘똘 뭉친 집단이기에, 도무지 내가 하는 이 의미 없는 행위를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나는 사람들을 이해시키려들지 않는다.



그들은 밤을 새우고 홀덤을 치며 술을 마신다. 그들에게는 차라리 아주 낭비하는 것만이 유희인 것이다. 나에게 글쓰기가 유희인 것처럼.

그들이 홀덤에 관련한 룰을 설명하려 들 때에. 나는 그 행위에 대해 전혀 이해하려들지 않는다. 그것에는 어떤 예술적인 모습이 결여되어 있다. 오로지 표정과 계산만이 있을 뿐이다. 그 모습이 영화 한 편이 될 수 있다 해도 그건 이미 너무 뻔해진 이야기이며 유행이 가버린 이야기다. 나는 계속해 서서 그들이 어떤 이유에서 밤을 새워가며 홀덤을 하는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비록 그것이 2028년 LA올림픽 시범종목으로 고려될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들은 굳이 나에게 홀덤의 족보를 설명하려 든다. 그러면 나는 설명하는 그들의 입 주변을 유심히 보면서 어딘가에 심취해 떠드는 사람들의 얼굴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관찰하는 것이다. 하얀 침이 고이는 입꼬리와 그것을 흘리지 않기 위한 본능적 수축. 위태로운 그 모양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들은 나 또한 자기들처럼 이제부터 그것에 빠져들게 된 것인 줄 안다. 그들이 눈을 더욱 크게 벌리며- 곧 그 이야기는 도로 자신의 입술과 동공 안으로 흡수되어 버린다. 그러면 나는 늘 하던 대로 고개를 끄덕. 여전히 그 자리에, 포커 족보에 관해서라면 아는 게 없는 사람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엥. 뭘 써요?


나는 그들에게 구태여 어떤 이유에서 글을 쓰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글쓰기는 나를 가장 멀리 보내는 동시에 내 속의 가장 깊은 곳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이 행위는 시간을 통제하고 벗어나며 모든 것의 겉과 속을 한 번쯤은 손끝으로 찍어먹어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들이, 내가 느끼는 기억과 생각의 맛을 알까.


다시 돌아와서 내 고민은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네시 반에 일어나는가 하는 것이다. 매일 네시 반에 일어난다면 나는 지금보다는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꼭 그렇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어쨌든 쓰다 보면 그 무수한 문장들이 쌓여 하나의 좋은 페이지가 되어있을 테니까. 그렇게 된다누구라도 나의 글을 기다려주게 되지 않을까.


나는 그것이 글을 쓰는 우리들을 어디로든 데려다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책과 이불이 있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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