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avu letar Mar 15. 2023

그 남자의 BGM (4)

 주성아, 오늘 김치찌개 먹으러 가자. 동네에 30년 된 김치찌개 집이 있는데, 엄청 맛있고, 거긴 가격도 안 올라. 너무 착해. 오늘은 거기 가자.


 싫은데 난. 김치찌개가 진짜 먹고 싶은 거야? 난 싫은데. 난 장어 먹고 싶어.






결혼에 있어서 현재의 경제적 상황이 중요할까.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건데. 엄마는 아빠의 돈을 보고 결혼했지만 결혼한 지 18년 만에 깡그리 말아먹었지 않나. 한 번쯤 시원하게  망해본 집이 있나. 돈이 있고 없고는 당장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닐지라도 돈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나에게는 정확한 현실을 파악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진짜 아버님이 잘못되셔서 파산까지 갔겠지. 설마 그런 걸 가지고 거짓말하겠어?


용 부장은 아침부터 또 내 속을 뒤집는 소릴했다. 그래, 그저 남의 일이지. 네 여동생이 이 상황이래도 그렇게 태평한 소릴 할 수 있을까.

하긴, 용 부장은 남편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 16년을 기다린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용 부장 옆에서 말없이 그저 걸었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와 깨끗하게 씻고 파자마 소매를 걷어올렸다. 나는 다시는 들어가지 않기로 결심한 SNS로 로그인하여, 탐정 정기쁨을 소환했다. 아무도 보지 않는 SNS를, 그는 거의 일기장처럼 사용하고 있다. 나는 그 안에서 또 어떠한 사실을, 혹은 상상을 찾아낼 수 있을까.


따분하다. 거기엔 역시나 그렇고 그런 자연풍경이 대부분이었다. 손가락으로 화면을 밀 때마다 구름 산 나무 다시 산 나무 같은 것들이 올라왔다. 6개월치의 게시물을 올려 보내자 비로소 다른 그림이 있었다. 노란색 A4용지였다. 거기엔 주성의 필체로 '재훈에게'라는 말로 시작되는 편지가 쓰여있었다. 재훈은 반년 전 즈음 자살로 죽은 친구였다. 그 친구의 얘길 얼핏 했으나 그때 주성의 얼굴에 슬픈 기색이 있었던가. 감정이야 어떻든 나라면 죽은 친구에게 할 말을 SNS에 올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저 세상에 갈 리 없기 때문이다.

게시물을 더 올리다 보니 제주 하늘에서 새떼가 날아가는 영상이 보였다. 나는 그즈음에서 그것들을 보며 좀 쉬었다. 주성도 같은 하늘을 보며 쉬었겠지. 다시 달렸다. 본 취침시간이 열한 시인데, 이제 시계가 새벽 한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뭔가 찾아내기 전까진 멈출 수 없었다. 이 끝도 없는 게시물이 끝난다 해도. 아무 소득 없이 게시물이 끝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지. 돌아가서, 그때는 쓰여있는 글을 봐야지. 나는 이제 거의 기계적으로 게시물을 올렸다. 그의 방에 커다란 아이스크림 통이 보이고 그 안에 숟가락 두 개가 엉켜 있었다. 댓글- 오호 형님, 왜 숟가락이 두 개죠?- 정주성의 대댓글- 왜 두 개긴. 여자친구가 옆에 있으니까 두 개지.- 전 여자친구는 1년 전에 헤어졌으며 반년을 사귀었다. 자기보다 열세 살이나 어린 여자라고 했다. 나는 한참을 더 내렸다. 거기엔 현재 정 과장이 몰고 다니는 차가 아닌, 다른 외제차가 업로드되어있었다. -내 자랑스러운 애마 '희동'이와 '구름'이. 그리고 내 안의 상남자를 불러내는 '민수'- 거기엔 '억' 소리가 나는 차량 두 대와 국산 중형차 한 대 가격의 오토바이가 나란히 서있었다.


나는 휴대전화의 화면을 껐다. 눈이 피로해서 잠깐 감았다 떴다. 그러고 나니 내 방의 풍경이 선명하게 보였다. 내가 좋아하는 빈티지 스탠드 조명과 책상, 아이비 화분이. 그리고 벽에 붙은 아날로그시계가. 시간여행을 하고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그가 주차해 두었던 세 대의 값 비싼 차량과 파산. 열세 살 어린 전 여자친구, 그의 낯 부끄러운 취미와 여가시간. 그의 피부를 만지는 여리고 하얀 손들. 그게 뭘 뜻하는 걸까. 나는 그것들이 만들어낸 점을 하나하나 정성껏 이었다. 그러나 그 캐릭터에는 동공이 없었다. 부디 누구라도 와서 이 난해한 캐릭터의 눈에 점 하나 찍어주기를.






주말에 주성과 한남동에 갔다. 먹고 싶은 디저트가 있다고 해서 노량진에서 조인해 그 카페로 갔다. 인테리어가 그리 화려하지도 독특하지도 않았지만 셰프의 실력만큼은 화려해야 할 곳이었다. 동네에서도 흔히 볼 수 있을 것 같은 케이크가 조각당 1만 5천 원이었기 때문이다.


 뭐가 이렇게 비싸?


 여긴 원래 그래.


 원래가 어딨어. 주인이 가격을 그렇게 매긴 거지.


나는 짐짓 비웃는 투로 주성을 쳐다봤지만 그는 진열장 안의 각종 디저트를 구경하느라 내 말은 안중에 없었다. 속이 메슥거리며 배가 살살 아파왔다. Toilet 표시가 있는 것을 보고 주성에게 잠깐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내가 나왔을 땐 그가 매장의 한편에 자리를 잡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테이블엔 이미 케이크 세 가지와 음료 세 잔이 놓여있었다.  


 여기 나 말고 또 누구 오니?


그는 내 말에 개구진 표정으로, 보란 듯이 모든 케이크를 한 입씩 배어 물었다.


 그러게 왜 화장실 갔어. 나 주문할 땐 어디 가지 말고 나 말리라니까.


파산이라서 세상 떠나가게 울었다는 놈이, 디저트 값으로 7만 원을 써? 너 그 정도면 정신에 문제 있는 거야.라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참았다. 나는 종일 마음을 가다듬고, 대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차분한 투로 그에게 말했다.


 우리, 다른 건 그렇다 쳐도 이제 먹는 데 쓰는 비용은 좀 줄이자. 이제 얼추 먹고 싶은 건 거의 다 먹었잖아. 매번 만날 때마다 이렇게 쓰는 거, 나도 이제 좀 부담돼. 좀 아끼고 싶어.


 난 싫어. 다른 건 몰라도 먹는 데 돈 아끼는 건 싫어. 좋은 걸 먹을 때 잘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니까.


나는 그의 말에 코의 중앙이 뻐근해지며 안압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월 말 회식이 있는 자리였다. 나는 혼자 생각에 잠겨서 사람들이 웃으면 내용도 모른 채 따라 웃다가, 야유를 보내면 알지도 못하는 내용에 그들과 같이 표정을 찡그리고 했다.


그때 즈음엔 회사 로비에서 나와 정 과장이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이 종종 직원들에게 목격되었으므로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가 알고 있는 상태였다. 1차 2차 3차로 자리를 옮길 때마다 내 옆에 앉은 사람들도 바뀌었는데 그들은 인사치레로 우리가 잘 지내고 있는지 물어보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억지로 웃었다.


3차 술자리가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직원들 중 두 명은 이미 양껏 다리를 벌리고 소파에 누워있었다. 그들을 보고 있는데 김 전무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술도 깰 겸, 잠깐 바람 좀 쐬자고.


BGM이 OO인 남자 (5)에서 계속



매거진의 이전글 그 남자의 BGM (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