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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vu letar Mar 22. 2023

그 남자의 BGM (5)

3차 술자리가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직원들 중 두 명은 이미 양껏 다리를 벌리고 소파에 누워있었다. 여전히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직원들은 일과 가정사를 왔다 갔다 하면서 서로 동문서답인 대화를 이어갔다. 그들은 무거운 눈꺼풀을 내렸다가 다시 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데 김 전무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술도 깰 겸, 잠깐 바람 좀 쐬자고. 그 술자리에서 멀쩡한 건 나와 김 전무뿐이었다. 계단을 내려가 가게 문 앞에서 그가 내게 하얀 담배 한 까치를 내밀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끊었어요.


김 전무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래?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나에게 내밀었던 담배를 자기 입에 가져가 물고 불을 붙였다.


 요즘 일은 좀 어때요. 아직 많이 바쁘죠?


 네. 아무래도. 완전히 안정화되려면 아직은 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렇겠죠. 고생이 많아요.


 감사합니다.


그는 담배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10대처럼, 담뱃불을 바라보며 필터를 빨았다.


 요즘 정주성 과장이랑은 잘 만나고 있어요?


그가 미소를 지으며 다시 내게 물었다. 그의 입에서 너무 뜻밖의 이름이 나왔으므로, 나는 갑자기  형광등에 눈이 부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네. 뭐. 잘 만나고 있어요. 그런데, 어떻게 전무 님이 그런 걸 다 물으세요?


 아니. 사실 이 얘길 하고 싶어서 불렀어요. 정기쁨 씨가 그 친굴 왜 만나지? 도저히 이해가 안 돼서.


 어. 좀 당황스러운데요. 정확히 어떤 부분을 말씀하시는 걸까요.


 나도 좀 놀랐어요. 정 과장을 만난대서. 내가 꼭 이 말을 하려고 그랬거든. 정기쁨 씨는 우리한테는 아껴주고 싶고 같이 오래가고 싶은 직원이에요. 이런 일로 괜히 마음이 상해서 회사와 관계가 안 좋아지는 건 좀 아니잖아. 난 개인적으로 정기쁨 씨가 그 친구를 안 만났으면 좋겠어. 아, 혹시 오해하지 말아요. 나 지금 취한 거 아니에요.


 헤어지고 퇴사할까 봐 우려하시는 거라면, 그런 일은 만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어차피 정 과장은 지사 사람이기도 하고······.


 아니요. 그런 일로 퇴사하는 건 당연히 말도 안 되고. 기쁨 씨가 모르는 게 많아요. 내가 벌써 보자, 정 과장을 한 7년 정도 봤지? 기쁨 씨랑은 결이 다른 친구죠. 그렇죠. 결이 완전히 달라요. 좋은 영향이 오고, 또 가는. 그런 관계가 좋은 거잖아요. 내 개인적인 생각은 그렇다고.


그는 담배를 손가락으로 툭 쳐서 끄고 대형 스테인리스 재떨이에 던져 넣었다. 그는 내 어깨를 툭 치더니 앞장서서 술집으로 올라갔다. 그가 지나간 공기에서 그을린 냄새가 났다.




회사에서는 정 과장의 무엇을 본 것일까. 김 전무는 회사의 핵심 인물로, 그가 나쁘게 생각하는 직원은 더 이상 사내에서 발전하기는 어렵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사회생활도 사생활도 별로인 남자를 내가 끌어안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하필, 내가 왜.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한 문장으로 정의한다면?


가끔 머리가 지끈거릴 때 나가는 글쓰기 모임에서 모임 장이 우리들에게 물었다. 한 사람씩 뻔한 대답을 하며 나에게 차례가 돌아왔을 때, 나는 심하게, 폐렴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일부러 마른기침을 시작했다. 모임 장이 어이구 어이구 하며 나를 건너뛰었다. 사랑? 최근엔 생각해 본 일이 없는데. 나는 모른다. 나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것. 전혀 알지 못하는 것. 내가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이 나이 먹도록 사랑 한 번 제대로 못해본. 그게 이상한 일일 수도 있는데.


물론 나도 어릴 때야 아팠던 짝사랑도 해봤고 풋사랑도 해봤다. 그러나 그걸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할 수도 없는 그런 시기에, 누군가를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이후로 많은 연애를 했지만 나는 그들 중 누구도 사랑했다고 볼 수 없다. 어떤  것은 연민이었고 또 어떤 것은 존경이었다. 게다가 나는 늘, 결정적인 순간에 도망쳤다. 사랑은, 오래 참고 기다리는 일이 아닌가. 나는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왔다. 부모님으로부터, 나를 지은 신로부터. 그러나 나는 아직도 누군가에게 사랑을 나누어준 일이 없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아무리 날씨가 좋아도 마음에 돌덩이가 느껴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할까. 나의 삶을 소중히 여기고 내 손으로 인생을 망치지 않는 것도,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하는 것도, 사랑의 일환이 아닌가. 정신을 차려야지.





정 과장의 머리 위에 무지개 색깔의 파라솔이 펼쳐져있었다. 비가 안개처럼 내렸다. 정확히 일주일 만이었다. 그러나 우리 사이에 '사랑이 무엇일까'같은 빨간 질문은 없었다. 소형버너 위 얕은 뚝배기에서 피조개가 툭툭 터졌다. 그도 나도 그 모습만 바라보았다. 그가 내 접시피조개 하나를 놓으며 먹어 봐. 하고 말했을 때 내가 그에게 물었다.


 잘 지냈어, 일주일 동안?


 잘 지냈지.


 나 물어볼 거 있어.


 뭔데?


정 과장은 긴장하지 않은 척했지만 나는 그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너 회사에서 뭐 잘못한  있어?


 아니.


나는 그의 양쪽눈을 번갈아보았다. 그렇게 빨리 아니.라고 대답할 줄은 몰랐다.


 아닌 게 아닌 것 같던데. 뭐가 있었으면 있었다고 솔직하게 말해 줘. 자기가 떳떳한 거면. 


 혹시 김 전무가 뭐라고 했어?


 누가 뭐라고 한 걸 얘기하는 게 아니라,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한 거야 난. 뭔진 알아야 나도 판단을 할 거 아니야.


 그 양반, 술집 다니면서 여자 허벅지나 주무르시는 분이. 무슨 혀가 그렇게 기실까.


 뭐라고?



그 남자의 BGM (6)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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