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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vu letar May 12. 2023

그동안 앞으로 감사합니다.

그 신발을 신고 전신거울을 보자마자 '윽'하고 몸이 얼었다. 한참 그러고 서있었다. 화면으로는 참 예뻤는데 내 발에 끼우니 고깃집에서 아저씨 신발을 훔쳐 신은 것처럼 보였다. 유명한 브랜드의 샌들이었고 내가 좋아하는 광도의 가죽인데. 나는 입술을 코까지 한 껏 끌어올리고 신발을 원래의 모습대로 포장했다.


이상할 정도로 정신이 맑아서 새벽 세시가 되어서야 겨우 잠들었다. 꿈 속에서 모래로 쌓은 거대한 탑들이 수없이 서있는 걸 봤다. 보는 것 만으로도 건조했고 입 안에서 버석한 모래가 씹혔다. 모래탑 사이를 하염없이 돌아다니는데 느닷없이 내 이불이 보였다. 새벽 여섯시였다. 눈곱으로 들러붙은 눈을 겨우 떠서 핸드폰을 보니 문자가 와있었다.


딩동♬ 집배송이 어쩌고 저쩌고. 오늘 너가 반품시킨 신발 가질러 갈 거야. 음, 한 22시~00시쯤?


대충 그런 내용이었다.


이 시간에 뭐하는 거야. 사람 잠도 못자게. 피곤에 쩔어서 한숨을 쉬고 다시 눈을 감으면서도, 아니 물건을 밤 열 시에서 열두시 사이에 가지러 온다고? 말이 돼 이게? 말은 저렇게 해놓고 아침에 올 것 같은데 촉이. 하긴 내 촉 똥 촉이지. 그래도 모르니까 출근하면서 문 앞에 내놔? 아니지. 저번에 그랬다가 분실했잖아. 그랬다간 또 보상도 못받고 끝나겠지. 절대 안되지. 밤에 가질러 오길 믿고 퇴근하고 집에 와서 바로 씻······.


이런 생각을 하다가 다시- 잠에 빠졌다.




출근을 했더니 용 부장과 김 이사가 또 싸우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요즘 거의 매일 싸운다. 내 뒤가 용 부장의 자리이므로 그들은 꼭 내 뒤통수에서 싸운다. 듣고 있으면 황당한 말들이 오간다. 나는 어떤 때에는 웃고 또 어떤 때에는 덩달아 그들 서로에게 서운해진다. 용 부장에게 말빨로 밀리는 김 이사는 어느 순간 밑도 끝도 없이 우겨대는데, 그러면 내 머릿속에 미취학 아동들이 맨발로 뛰어 들어와 크레파스로 낙서를 시작한다. 그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예. 물건 내놨어요? 아아아아 거기 주소 어디예요?


 뭐요? 아. 택배.(주소가 어디냐니. 당신이 전화했잖아.)


중년 남자의, 아니- 중년보다도 더 낡은 목소리였다.


 여기 OO동이요.


 아아 거기 OO빌라?


 네. 물건 안 내놨어요. 밤 열시에 오신다면서요. 문자에 그렇게 돼있던데요.


 하·······. 그거는 그냥 오늘 중으로 간다는 뜻이죠. 물건 내놨어야죠.


 아니. 안내 문자에 밤 열시에 오신다고 돼있고, 물건이 비싼거라. 밤에 오신다고 돼있는데, 그걸 벌써부터 왜 내놔요 제가. 분실되면 어떡하라고요.


시계를 보니 오전 아홉시 반이었다.


 아 그거는 오늘 중으로 간다는 뜻이지 열 시에 간다는 게 아니라니까요.


그 늙은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뒤에서는 계속해서 용 부장과 김 이사가 언성을 높였다.


 아니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밤 열시에 온다는 뜻인 줄 알죠 당연히. 그렇게 문자가 왔는데.


 아 그럼 오후에 언제있어요 집에.


 없어요. 밤 여덟시는 돼야 있죠.


 아 ^&**&67(알아들을 수 없음) 그래서 그럼 내일 내놓을 거예요 말 거예요.


 내놔야죠 당연히.



나 또한 짜증스런 투로 전화를 끊고나서 모니터 앞에 앉아 한참동안 입술에 붙은 각질을 떼어냈다. 내놓을걸. 저러다 내일 안오면 어떡해. 그냥 반품을 하지 말까. 이 택배 뭔지 찝찝한데. 내가 짜증 좀 냈다고 보복하는 거 아냐? 아니면 지금 다시 전화해서 개인적으로 반품 한다고 해? 아니지. 바빠 죽겠는데 언제 그러고 앉았어. 반품 하지말고 그냥 신어? 그러나 어젯밤 거울에 비쳤던 바퀴벌레 발같던 내 발이 떠올랐다. 아냐. 절대로 반품해야돼. 그건 절대 못 신지. 그래.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나.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니 다른 택배가 와있었다. 기다리던 그 립글로즈였다. 무슨 성분이 들어있어서 바르면 입술이 통통하게 부풀어오르는 립글로즈였다.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그걸 언박싱하고 물건이 정상인지 확인한 후 욕실로 들어가 따뜻한 물에 샤워를 했다. 몸을 닦고 거실로 나와서 립글로즈에 붙어있는 비닐을 벗겨냈다. 대충 쓱쓱 바르고 기다렸다. 누워서 릴스를 보는 사이- 입술이 화끈거리고 따가워지더니 곧 과도하게 쓰라렸다. 일어나 거울을 보니 입술이 퉁퉁 부어있었다. 마음에 들었다. 나는 한참동안 입을 닫았다 벌렸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봤다가 다시 정면을 봤다가


그때 누가 문을 두드렸다. 나는 어제처럼 다시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다시 세 번. 아까보다 더 세게 문을 두드렸다. 저녁 아홉시였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이 없는데. 그 사람은 다시 더 강하게 문을 두드렸다. 나는 없는 척을 하기위해 숨을 참았다. 그때 젖은 머리카락 끝에서 물방울이 뚝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ㅜㅏ59(알아들을 수 없음)


문 밖에서 구시렁대기에 들어보니 어딘지 익숙한 목소리였다. 눈을 감고 귀를 세우니 다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지금쯤이면 집에 있다더니 왜 아무도 없느냐하는 식의 짜증이었다. 다행히도 그 목소리가 집 앞에서 오래 머무르지는 않았다. 발 소리가 멀어졌다.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뭐야 이거. 연락도 없이 이 시간에 남의 집 문을 두드려? 불편 신고 할 거야 이거. 그 남자의 발 소리가 멀어지고나서 나는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의 잠금을 풀어서 아침의 그 문자를 찾아냈다. 그리고 아까전에는 몰랐던 사실을 발견했다.


그 번호로 온 문자는 오늘 처음이 아니었다. 위로 한참이나 더 스크롤을 올릴 수 있었다. 전화번호의 택배는 21년도 부터, 그러니까 내가 이 집에 이사했던 그 날부터 꾸준히 무언가를 배송 해주고 있었다. 생수와 닭가슴살 그 많은 책들 또는 휴지. 또는 매번 쟁이는 그 화장품. 내가 아끼는 그 재킷, 속옷. 그릇까지. 나는 천천히 내려가면서 물건들을 읽었다.


택배사가 어떤 시스템으로 운영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업무용인 휴대폰 번호는 그대로, 사람은 계속 바뀌었을 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 또는 그들이 수도 없는 물건을 내 집 앞에 내밀어주고 있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같은 분일지도 모르지. 반품은 처음이니까. 통화도 처음이고.


그리고 오늘 받은 안내문자 바로 위에 이런 문자가 있었다. 아침엔 눈을 반밖에 못떠 지나쳐버렸던,



"택배입니다반품하실거있나요전화나문자주세요문자주실때주소도같이부탁합니다이용하요주워서고맞습니다문앞에두세요

도착예정시간 : 오늘중의로들레요"


나는 고개를 숙이고 문자를 계속해서 읽으면서 한참 미간을 꾹꾹 누르고 입술을 만지고 했다. 이제는 혓바닥까지 아렸다.


나는 종이와 두꺼운 펜을 가지고 나와서 될 수 있는한 또박또박 썼다.


미리 못 내놓아서, 다시 오시게 해서 죄송해요. 그리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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