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오면서 가장 기대했던 것은 다양한 문화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고등학교 때 처음 보았던 연극에 반해 '서울에는 이렇게 멋진 경험들을 할 수 있는 기회가 가득하구나!' 하는 설렘이 서울에 대한 동경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경기도에 있는 대학교에 진학한 후에는 서울을 오가며 전시와 연극을 자주 보러 다녔다.
하지만 서울 살이에 익숙해져 가면서 내가 전시에 관심이 있었다는 사실도 차차 잊어갔다. 어쩌면 전라도에 살 때보다 문화생활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져 이를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매일 반복되는 출근길과 도시의 소리, 냄새에 지쳐 문화생활을 놓고 산 지 몇 달 정도가 지나게 되었다.
그렇게 지내다, 어느 날에 내가 예매한 전시를 아직 보지 않았다는 알림이 울렸다. [문도맨도-판타스틱 시티 라이프]라는 전시였다. 일본에 사는 어느 서양 작가의 전시였는데, 마침 서울에 지쳤던 나에게 때 좋게 울린 알림에 신이 나 같이 전시를 보기로 했던 내 동생에게 얼른 연락했다.
"예전에 내가 예약했다는 전시 있잖아, 그 전시 보러 가자. 다음 주에!"
동생도 마침 그날 일정이 비어 일정 변경 없이 전시를 보러 갔다. 비록 그 작가는 일본의 풍경에 대한 감상을 (그림으로서) 서술했지만, 나는 그것이 마치 서울에 사는 나를 위로한다고 느꼈다. 시골이 아닌 도시에서 어떤 식으로 매력을 느끼고 살아가는지, 어떤 점을 판타스틱하다고 느끼는지에 대해 작가의 시선과 표현을 통해 알려고 했다. 그때 떠오르는 생각들을 모두 휴대폰 메모장에 적었다. 무엇보다도 도시스러운 물건에 메모를 하면서도 행복함을 느끼는 순간, 나는 이제 서울에 적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붙었다.
작가의 그림은 저작권 문제로 어디 올릴 수 없으니, 그때 사색했던 것들 몇 가지를 적어보려고 한다.
1-1. 나는 과거로부터 현재로 흘러온 존재지만, 흐를 수 있다는 건 변화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이야. 내가 나 혹은 다른 누군가에게 말했던 다짐 때문에 목표를 바꾸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1-2. 나를 어떤 틀에 가두지 말자. 사람이라면 한 가지 특징만 있을 수가 없으니까. 변화는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니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바뀌는 것이 이렇게 많은데 그 사이에 내 생각 하나쯤 변하는 것 정도야.
- 나는 이전부터 내 목표를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왔다. 그래서 목표를 바꾸는 것을 두려워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볼지를 두려워했고, 스스로를 '의지가 부족한' 사람으로 정의했다. 하지만 변화가 자연스럽다는 것을 인지하고 나니 현재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이고, 나는 시간과 함께 흐른다.
2-1.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들 - 나체를 그리는 것이 편하고 좋아, 간결한 그림이 그리기 좋고 그 사이에 디테일을 끼워 넣은 게 좋아. 관찰할 것이 많은 산책이 좋고, 그 느낌을 사진으로 남기는 것이 좋아. 생각을 기록하는 것도 좋고, 다시 거기서 영감을 얻는 것도 좋아. 좋은 음악을 들으며 산책하고 사진을 남기는 것이 좋아. 하지만 그것을 그림으로 남기고 싶은 것은 아니야. 나는 실재하는 것보다 없는 걸 만들어 내는 것이 좋아. 사진을 그릴 때는 너무 정답을 찾게 되니까.
2-2. 사람이 있는 일러스트가 좋다. 어쩐지 풍경이나 사물만 있는 일러스트는 눈이 오래 머물지를 못한다. 자연을 그린 것보다는 도시를 그린 것이 좋고, 현대적 착장을 한 인물보다는 나체의 인물을 더 좋아한다. 꾸미지 않은 느낌.
- 도시에서도 내 삶을 즐기고 누릴 방법을 찾았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은 배경이 아니라 그 배경 안에서 행했던 것들이었다. 그것들을 발견하고 행할 방법을 모색하니 엉켰던 실타래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 사회화된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사실 중 하나는 '인간이라면 외출할 때 옷을 입는다.'라는 것이다. 하지만 옷을 입음과 동시에 우리는 스스로를 꾸미고 가리게 된다. 그래서 도시에서 누구보다 꾸밈이 없는 사람, 즉 나체로 도시를 거니는 사람을 그리고 싶어졌다. 그것은 내 자화상이 되기도 할 것이다. 누구보다 도시를 낯설어하지만 이곳을 자연스럽게 느끼기 위해 애쓰는 내 모습을 담은 자화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