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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혜 Sep 07. 2023

여름햇살을 담은 송알송알 포도 주스의 맛


 이걸 만들게 될 줄이야.

정확히 이 주 전. 미락동 미화 씨와 응열 씨의 집에서 돌아오 날.  지런한 미화 씨는 언제 바리바리 꽁꽁 짐을 싸 메어 놨는지. 마당 한편 저장고안쪽에서 입이 떡 벌어질 만큼 수확한 농작물을  비롯한 먹거리들을 내놓기 시작한다. 전날 아이들과 함께 캔 감자 10kg 한 박스, 청양고추 양파 중자망 한 자루,  사과 10kg 세 박스, 복숭아 10kg 한 박스, 내 허벅지만 한 , 아니. 팔뚝만 한 조선호박 여섯 개 , 가지 다섯 개, 가마솥에 삶은 토종삼계탕, 깍두기 큰 김치통으로 , 배추김치한통을 마저 꺼내주려는 걸 간신히 막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이걸로 당연 끝이 아니었으니까. 포도 두상자까지.


이 포도로 말할 것 같으면. 조금 많이 거슬러 가야 한다.

강릉 종합운동장에서는 4월이면 각종 묘목을 나눠 주었다 터였다. 대략 이 십여 년 전. 식목일. 미화 씨는 포도나무 한그루를 받아 집으로 가져왔다.

"이것 좀 봐. 엄마가 오늘 종합운동장에 가서 줄 서 받아온 포도나무야. 귀엽지?" 달뜬 그녀의 얼굴이 여태 선명하다. 내가 보통 긍정적이며 실실 잘 웃는 사람으로  자랄 수 있었던 데에는 미화 씨의 덕이 무척 크다고 볼 수 있다.

자라는 내내 미화 씨는 조곤조곤한 말과, 깊은 보조개의 미소를 보이며 긍정의 에너지로 나를 길러냈다. 물론

동생과 싸우는 날엔 어김없이 파리채며 방 빗자루가  사정없이 날아오긴 했지만. "나중에 엄마, 아버지 없으면 너희 둘 뿐이야. 또 싸우기만 해 봐."

흑역사는 다음 기회에 더욱 깊고 진지하게  이야기해야겠다.


 아무튼.  우린 교동 택지의 아파트에 살고 있었는데, 미화 씨가 어째서 수많은 묘목 중 하필 포도나무를 받아온지에 대해서 글을 쓰는 지금. 갑자기 무척 궁금하다. 아무래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녀에게 들어봐야겠 생각을 해본다.


덩굴식물인 포도나무는 당연하게도 아파트 베란다 화분에서 무럭무럭 자라지 못했을 터였다. 졸업 후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며 나는 미화 씨가 그토록 자랑하던 포도나무 존재자체를 잊고야 말았다. 음, 어쩌면 원래 크게 관심 없었을는지도 모를 일.


 큰딸과 작은딸 결혼을 시키고, 부부는 다. 벌써 십 년 즈음되었을 테였다.

어느 해 여름. 미화 씨는 마당 한편에 심어두었던 포도를 첫 수확하게 된다. 십 년 정도 아파트 베란다 작은 화분에서 오종종하게 자랐던 포도나무가 끝내 열매를 맺고야 말았던 터. 식물을 아끼미화 씨는 작은 포도나무 한그루를  데리고 함께 이사를 했터였다. 포도나무 입장에서는 무척 감사하여 눈물 나는 순간이었을 듯싶기도. 어쨌든. 사연 많고 기특한 포도나무에서 수확한 포도열매. 올해엔 미화 씨가 여느 해보다 조금 일찍 수확을 하여. 당도가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이 많은 포도를 어쩜 좋으려나, 어젯밤 나름 골똘히 생각해 본바.

포도주스 만들어보자.  그렇게 나는 생전처음 포도주스를 만들게 되었다.


인터넷에 수많은 레시피 중 하나를 후루룩 읽어본다. 그리고는 내방식을 버무려 조리시작.

포도를 세척하고, 포도줄기는 따지 않은 채  6리터 잼팟에  담는다.  물 없이 조리가 가능하다고 했으나, 나는 혹여  눌어붙거나 타버릴까 염려되어 500ml 물을 추가한다.  중불로 어느 정도 끓여낸 후, 약불로 뭉근해지길  기다린다. 사탕수수 원당과 프락토 올리고당을 양껏 섞어준 후, 한 김 식기다리길.


조금 궁리를 해본다. 이대로 채에 걸러, 유리병에 담아볼까. 어째, 유리병에  담기는 포도주스보다 그대로 흐르는 주스가 더 많아 보인다.

역시 손이  꼼꼼하지 않은 터.  싱크대 개수대안으로 입구가 유난히 넓은 냄비를 준비하여 쪼르르 채에 걸러본다. 요리는 장비빨이라는데. 마땅한 장비가 없으니 조금 아쉬운 날이다. 아무튼 끓이고 식혔던 시간만큼 , 천천히 채에 걸러 신중하게  포도액을 따라낸다.


6리터 잼팟에 꽉 찼던 포도. 이내 4리터 용량의 냄비에 그득 담긴다.  

두 개의 유리포트에 나누어 담고 , 유리잔에도 담아 냉장실에 넣어 둔다. 시원하고 달달한 포도주스를 마시며 , 하얀 치아를 드러내  웃어 댈 두  아이가 떠오르니 가슴속이  더욱 시원하다.


 좁은 아파트베란다 화분에서 웅크려 감내하며, 매서운 겨울을 지나, 뜨거운 여름햇살을 견디어, 기어이 송알송알 진보라색 열매를 익혀낸 기특한 포도나무. 어쩐지 우리의 삶과 조금 닮은 듯하다.

여름햇살을  가득 담은 마당 포도열매로 은근하게  직접 만든 주스의 맛이란 ,

릴케는 이렇게 말했다. 자연은 기다릴 줄 안다. 그 기다림 안에는 성장에 대한 믿음과 뜨거운 사랑이 담겨있다.


2023년 여름, 미화씨의 포도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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