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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혜 Oct 04. 2023

코끝으로 전해지는 진한 추억


예나 지금이나  응열은 바깥에서 사 먹는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하지 않는다기보다 어쩌면 싫어한다는 표현이 그에겐 더 어울릴 법하다. 주로 고기나 고기의 뼈째 푹 끓여서 먹는 음식  질색하는 편. 육개장이라던지.감자탕, 백숙, 특히 사골국은 두 번 이상 먹지 않는다. 나로서는 조금 이상하리만치 느껴지는 식성. 끈덕지게  변함없다.


다만 고기를 주재료로 하지 않으며 된장이나 고추장에 푸성귀 따위를 넣고 끓이거나 자박하게 지져낸 음식은 열 번이든. 스무 번이든 타박 없이 먹곤 한다.

그런 나의 아버지 응열과 우리 네식구는 내가 어려서부터 외식이란 해본 기억이 몇 번 없다. 고기를 구워 먹으러 식당에 가봤을 리는 만무였고, 흔한 중국집 또한 가본 기억이 없다. 초등학교 3학년 운동회날. 횡계에 사는 넷째 이모가 마침 , 우리 집에 다니러 와 점심시간에 김밥도시락을 먹는 대신 동네 하나밖에 없었던.  소라반점 데리고 가 짜장면을 사줬던 게. 나의 어린 시절 중국 음식점에 대한 처음이자 마지막 기억이다.


하니 미화는 어린 우리 자매에게  손수 돼지고기를 치대고 빵가루를 입혀 자글자글 기름에 튀겨내어 돈가스를 만들어 주거나, 생과 내가 피자팬이라고 불렀던. 지금으로 치자면 명절날 전을 부칠 때 쓰는 커다란 잔치팬. 거기가루를 반죽하여 , 넓게 깔고 그위를 포크로 콕콕 찍어 낸 뒤. 토마토소스를  펴 바른 다음 두어 가지 종류의 햄과 피망, 양파, 따위를 올려내, 모짜렐라 치즈를 듬뿍 뿌려 프라이팬 뚜껑을 덮어 구워 주기도 했다. 피자 치즈가 어찌나 두꺼웠는지 , 다 익혀진 피자를 먹으면서 킥킥대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쭈욱 끊이질 않고 늘어나는 뽀얀 치즈는 마치  아버지가 아랫목 구들에 깔고 자던 하얗고 두터운 목화솜 이부자리 같아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양념통닭을 두어 달에 한번 정도 꼭  시켜 주었다. 어린이날과 우리 자매의 생일, 크리스마스 때는 어김없이 양념치킨을 먹는 날이었는데. 육십 다섯이 된 지금까지도 어쩐 일인지 전화를 하길 좋아하지 않는 미화는 치킨값만 내어주고 , 내가 전화를 걸어 "양념치킨 한 마리 튀겨주세요. " 주문을 했으며 동생과 나는 신이 나서  그걸  찾으러 다녀왔었다.


 둘이 장난을 치며 치킨을 찾으러 갔던 수많은 날들이 어쩌면 눈에 선하다. 그때 나의 엄마 미화는 항상 "무를 한 봉지 더 주실 수 있나요. "  덧붙여 이야기하라나에게 잊지 않고  시키기도 했다. 그 덕에 나중엔 시키지 않아도 "무는 한 봉지만 더 주세요."라고 술술 말하게 되었다. 지금은 치킨 주문 시  무추가에 보통 500원 정도를 따로 받고 있으나 , 대략 삼십여 년 전엔 비닐에 담겨오 치킨무 추가 요금을 받진 않았다.


나에게는 우리 가족 넷이 외식을 나갔던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만한 기억이 있다. 그중 세 번 정도가 해변 막국수.

송정바닷가 소나무 숲길.  바로 앞 양철집들이 족히 오십여 가구 다닥다닥 붙어 지어졌던 그곳. 어른들은 송정과 구분 지어 일부러 애써 새마을 이라고 부르곤 했다. 내겐 그저 같은 송정 마을 뿐이었음에도.  그곳은 정주영 회장님이 드시러 자주 오셨다는데. 그때 나는 어렸기 때문이기도 했을뿐더러 무심한 성격 탓에 미처 거기 까진 알지 못했다. 다 자란 후에 우리가 맛있게 먹었던  그 막국수 집이 즘말로 이를테면  맛집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응열은 내가 열네 살이 될 무렵 중앙 고속버스 회사에 취직을 하 한 달에 반 이상. 서울과 강릉을 오가느라 나날이 바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고단했던  살림살이가 부쩍 나아졌는지 , 내가 열여덟 살 되던 해.  송정을 떠나 시내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리곤 그나마도 우리가 몇 번 외식을 나갔던. 송정해변막국수집엔 더는 가지 않게 되었다.


강릉에 부모님을 뵈러 갈 적마다 나는 어느 식당엘 가든 막국수를 되도록이면 먹고 온다. 그러다 어느 날  지금 내가 사는 동네에 강릉해변막국수가 있다는 을 정말 우연히 알게 되었고, 게다 살던 동네  송정 막국수와 같은 으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반가움을 감출길 없었다.


 그때 우리 마을 송정 막국수집에는 변변한 간판하나 없던 것으로 기억하는 터였다. 대체 삼십여 년 전 간판조차 없던 막국수 파는 가게와 같은 식당이라는 것을 나는 어찌 알았을까,  식당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자 코끝으로 전해지는 뭉근하게 짭짤하기도 진득하니 고소하기도 했던 ,   그 집 만의 고유한 어떤 냄새 때문이었을 테였다. 삼십여 년 전 맛보았던 막국수였음에 유한 냄새를 기억하는  내게 무척 굉장한 일이었다.

더욱 기막힌 것은 그 냄새와 함께 나도 모르는 사이 눈이 그렁그렁해지다 못해, 복받쳐 오르는  알 수 없 어떤 복잡한 감정이었다. 그건 그 시절 팍팍하고 조금 고단했을  젊은 미화, 응열.  동생과 나에 대한  결코 돌아갈 수는 없는. 그야말로  어린 날의 손꼽히는 은근하고  진 추억 덕분이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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