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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혜 Nov 15. 2023

조금 오래된 기억에 관하여


그러니까 언제였더라. 열네 살.

아마 추석 무렵이었을 듯하다.

그때, 나의 외할머니와 삼촌은 경기도 여주에 살고 있었다. 여주라고 기억할 수 있는 것은 도자기와 관련된 이정표랄까. 그런 것들이 당시 거리 곳곳에 널려 있었기 때문일 것이리라.


당시 대학생이었던 삼촌방에는 책들이 꽤나 많았다. 그걸 그냥 지나쳤을 리 없는 나는 기회를 틈타 엄마에게 이야기했다.  삼촌방을 살 봤는데 책이  많으니 몇 권  읽어 보고 싶다는.


 외출 나간 삼촌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그 시간은 또 왜 그렇게 길고 지루하게만 느껴졌는지.

얇지만 눈매가 서글서글하고 , 키가 훤칠하게 큰 삼촌이 돌아왔을 때.

쭈뼛거리며 서있는 나 대신 엄마가 이야기를 했다.


"아 그래? 그럼, 들어와. 네가 읽어볼 만한 것이 있으려나. 한번 직접 골라 볼래? 읽고 싶은 책 있으면 삼촌이 줄게. 집에 가져가서 읽어도 좋아."


어쩐지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나는 입술 끝을 자꾸 비죽 내밀었다. 조금 머뭇거리기는 했지만, 이내 눈을 반짝이며 책장으로 손을 길게 뻗었다.

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처음 들어보는 작가이름이었다. 실은 그때 나는 그것이 작가의 이름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무라미  하루키? 책 이름인가? 아, 되게 어렵네..

이런 생각 따위를 하며 키가 전봇대 같이 큰 삼촌을 빤히 올려다 봤다.


어쩐 일인지 삼촌은 그 책 말고 다른 책을 골라 주겠다 이야길 빙빙 둘러댔다.

그리스로마신화. 그래. 이 정도면 네가 읽을 수 있겠다.


이대로 안 되겠다 싶은 다급한 마음에 아기 고양이 같은  눈망울로 엄마를 넌지시  바라봤다.

"어머. 그 책은 왜 안되는데? 얘는 책을 좋아하고 잘 읽으니까 충분히 읽을 수 있을 텐데. 아까 그건 아끼는 책이라 그런 거야?"


"누나. 좋아하는 책이기도 하지만. 아이들이 읽을만한 내용의 책이 아니라서.." 삼촌은 엄마뻘 가까이 되는 큰 누나의 몰아붙이는듯한 말투 때문인지 , 그땐 도대체 무엇 때문이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아무튼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이내.  아 , 나도 모르겠다. 그럼 누나가 알아서 해.. 라며 자신 없는 듯 말을 이었다.

상실의 시대, 그리스로마신화, 로마인 이야기, 구나의 먼바다라는 책을 삼촌에게서 받아 들었을 때만 해도 알지 못했다.


내가 상실의 시대. 그러니까 노르웨이숲을 그 후로 한참이나 읽지 못하리란 것을.

또한,  그로부터 26년이  무라카미하루키 작가를 좋아하게 되리라는 것까지.


얼마 전 인터넷사이트에서 검색해 본 문학사상사에서 펴낸 상실의 시대. 무척이나 오래전 펴낸듯한 낡아 보이는  책표지. 그것이 도무지 이렇게 낯이 익는 것인지에 대해 알 수 없었다.  궁금증은 영 풀리지 않은 채  더해갈 뿐이었다. 노르웨이숲을 읽기 전까진.


마흔한 살의 나는 새로 들인 노르웨이 숲이라는 책을 소파에 누워 몇 시간에 걸쳐 읽어버린 후, 한참이나  먹먹해질 수밖에 없었다.


열네 살의 내게 책 건네주기를 한참이나 머뭇거리며  영 곤란한 표정을 비추던 삼촌의 기억. 그것을 받아  들고 그대로 책장 깊숙이 꽂아 둔 채. 어른이 된 나는 비로소  책을 읽고 나서야 , 그때 그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어느덧 많은 것이 희미해진 채로 나는 사십 대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삼촌은 여전히 이십 대의 훤칠하게 키가 큰 사내로 선명하게 머물러 있다. 짐작 차 할 수 없겠지만. 어디인지 모를 그곳에 그는 평안히 잠들어 있을 것이다.  그 시절 아마 그가 무척이나 좋아했을지도 모를 무라카미하루키 작가를.  이제는 그보다 한참이나 어른이 된 내가 이토록 좋아하게 되어 무척 행복하고, 감사하다.



죽음은 삶의 반대편 극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  노르웨이의 숲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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