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영혜 Aug 11. 2023

여름날 뜨거운 노을빛 그리고 깻잎


문득 그날을 떠올리면 지금도 콧등이 시큰해진다. 나에게는 8살 무렵.  처음 자전거가 생겼다. 그 자전거가 어디서 온 것인지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알지 못한다. 되려 궁금했던 적도 없었다. 지금에서야 어렴풋이 추측해 보건대. 살림이 궁핍한 우리 집에서  자전거를 장만해 주었을 리는 만무다. 미화(엄마) 에게 지금이라도 물어본다면. 명쾌하게 이야기를 들려 주겠건만. 그러지 않으려 한다. 그건 나의 사랑하는 할머니. 그러니까 응열(아버지)의 모친.  지금은 돌아가신 이용복여사가 마련해 주셨던 선물이겠거니 , 그냥 그렇게  나름 추억하고 싶기 때문이다.


어쨌든 내 기억 속엔 자전거를 보조바퀴부터 달고 타기 시작했으며. 어느 날엔 바퀴를 떼어내고 , 미화, 응열의 도움 없이 나 혼자 발을 구르며  당당하게  타게 된 것으로 남아 있다. 하나 그럴 리가 있으려나, 얼마 전 어디선가  보았는데 어린 시절 기억. 부모가 해주었던 좋은 일보다는 상처받았던 일. 좋지 않았던 사건과 그때의 기억을 유독 더 오래도록  품는다는 터였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닐 테다. 그저 내가 잘나  혼자 이만큼 어른으로  자랐겠거니. 의기양양 당치도 않을 생각을 하고 있던 적도 분명 있었다. 한데  어디 그렇기만 할 테인가. 부모의 사랑과 살뜰한 보살핌 없이 과연, 날 때부터 제 혼자 야무지게 무럭무럭 자라나는 아이는 대게 없 것.  아이를 낳아 기르고 나서야 어렴풋이 알게 된 사실이다. 어이없게도 그제야.


아무튼 , 자전거를 그렇게 타기 시작하면서 , 6학년 여름방학이었다. 여름에는 마을 앞바다. 송정 해수욕장이라고 했다. 그땐 여름 한때 외에는 철조망이 쳐져 뭔가 무서운 느낌으로 군인들에게 통제되고 있었다. 부터 소나무의 도시답게 목과 송정, 문에서 경포까지. 이어지는 해안로를 따라 제법 기다랗게 해송길을 끼고 있으며 , 지금도 송정바다 해송길 바로 뒤로는 작은 군부대가 자리하고 있다. 그때엔 내가 어렸기에 부대는 무척 크게 느껴지기만 했다. 지금 보면 뜨악할 정도로 작은 부대지만.


여름방학이면 은이와 나는 출근도장이라도 찍듯 , 아침을 먹고 나면 파란색튜브와 해양소년단 구명조끼를 하나챙겨 들고 송정바다로 나갔다. 비가 오늘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태풍소식이라도 있기 전엔 우린 방학 내내  송정해수욕장엘 갔다. 어느 날엔 저녁을 먹고 미화에게 산책을 하고 오겠다며 , 둘이 자전거를 타고 나가기도 했을 터였다.


그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이른 저녁을 먹고 우리의 자전거 봄바를 타고 바다로 달렸다. 그때나 지금이나 어쩐지 엉뚱한 걸 즐기는 나는 자전거에게 이름을 지어줬다. 봄바. 지금 들어도 썩 나쁘지 않은 듯하다.


봄바는 우리 둘이 타기엔 조금 작은 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 그럴 때마다 미화와 응열이 한편이 되어. 자꾸만 이건 2인용 자전거이기 때문에 , 너희 둘은 충분히 탈 수 있다 구슬리는 바람에. 그런 건가 , 하고 그냥 슬쩍 모른 척 넘어가 주었다. 분명 순전히 넘어가 준거였다. 마음 같아서는 새로운 자전거로 사달라고 졸라 보고  싶기도 했지만 , 나는 어쩐지 자라면서 내내 그러지 않았다.


은이는 바닷가 지척에 사는 시골아이답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엔 더 그랬다. 어찌나 피부가 하얀지 , 나는 그 애가 백설공주나 어떤 날엔 창백하기까지 하여 마치 신데렐라 같기도 했다. 미화를 닮아 어릴 적부터 나보다 여리여리 하기 까지 하니 , 동네에서는 응열이네 작은딸. 너무 예쁘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나와 은이가 둘이 있을 때에도 동네 어른들 칭찬은 입에 침이 마를세라 끊이질 않았는데 , 가만 듣다 보니 어느 날엔 샘이 나기도 했고 , 은근 부아가 치밀어 심술이 나기도 했다.


내가 그다지 까만 편은 아니었음에도. 여름이 지나고 보면 우리는 확연히 달랐다. 은이는 여전히 눈이 시릴정도로 피부가  하얗던 반면. 나는 눈이 부시도록 하얀 치아가 돋보이는 아이가 되어 있곤 했다.

어쩌면 그날도 그랬을 터였다. 잔뜩 심술이 났던 나는 툴툴대는 마음으로 은이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바다에 나갔다. 돌아오는 길. 도로바닥에 굵은 모래알이 하필이면 많았던 걸까, 우리 둘이 타고 있는 봄바의 바퀴가 도통 굴러 나가질 않았다. 은이더러 잠깐 내려보라고 했다. 일부러였다. 은이가 봄바 뒤를 잡고 있는데, 페달 있는 힘껏 굴러버렸다. 미련하게도. 그 덕에 은이는 굵은 모래알이 깔린 바닥에 나뒹굴듯 넘어지고 말았다. 내게도 나쁜 아이의 마음이 있었다는 걸 그날 어쩌면 처음 알았다. 걱정 보다 쌤통이다 고거, 이런 마음이 먼저 들었으니까.


한데 은이는 크게 소리 내어 울지도 않은 채, 바닥에 엎어져 가만히 있는 게 아닌가. 그제야 걱정이 되어 은이 옆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은이손을 잡고 일으켜 보는데 ,

큰일이다. 밀가루 같은 은이 무릎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터였다. 간신히 은이를 일으켜 세워 봄바에 앉혀 이번엔 내가  뒤에서 봄바를 살살 밀었다. 혹여 은이가 다시 다칠세라 어찌나 조심했는지 손에 진땀이 났다. 피가 도통 멈추지 않자, 나는 무언가를 생각해내야만 했다. 한데 뾰족한 수가 없었으니, 마냥 속이 타들어갈 뿐.


그러다 길가옆 밭. 누군가가 심어 두었을  향긋한 깻잎이 눈에 들어왔다. 어쩐지 깻잎이라면 피를 멈추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 의심스럽긴 했으나, 일단 피를 멈추게 하는 것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은이도 별말 없이 내 말 따라 무릎을 갖다 대었다. 제일 깨끗해 보이는  깻잎을 따서

은이무릎에 얹어  한참을 눌러주었다. 피가 흡수되질 않으니, 깻잎옆으로 빨간 피가 그대로  흘러나오길 여러 번 반복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다행히 흐르던 피가 멈췄다.

한데 뒤로 자빠질뻔했다. 하얀 무릎에 선명한 빨간 핏자국. 그 안에 하얀 뼈가 보이는 터였다. 나는 그때 정말 은이의 무릎뼈가 보이는 줄로만 알고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한데 참 대단한 동생을 둔 게 분명하다.

"언니, 괜찮아. 나 이제 안 아파. 울지 마. 혹시  엄마한테 혼날까 봐 그래? 걱정 마. 언니, 내가 빨리 뛰다가 넘어졌다고 할 거야. 이제 우리 집에 가자."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눈물이 되려 펑펑 났다. 삼십여 년이 지나 어른이 된 지금도. 나보다 더 언니 같은 동생이지만, 이날에는 얼마나 고맙고 든든하기까지 했는지 모른다. 강단 있는 은이가 부럽기까지 했다. 그건 다시 태어나기 전에 나는 결코 갖지 못할 기세 같은 거였다. "미안해. 언니가 잘못했어. 많이 아프겠다. 엄마한테 가서 빨리 보여주자." 나는 봄바를 아까보다는 조금 힘주어 밀었다. 은이와 나는 바다를 뒤로 한채 , 여름날 뜨거운 노을빛 가득한 송정마을 안  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모를 노부부 이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