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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혜 Aug 28. 2023

여전히 빛나는 그에게

우리는 누군가에게 빛나는 존재이다


젊은 시절 그의 얼굴은 말 그대로 빛이 났다. 그의 나이 서른에 나를 낳았으니, 내가 기억하는 그의 모습은 서른 중반 즈음일 테였다. 그가 가지고 있던 빛바랜 사진 속 앳된 얼굴을  들여다볼 때면 더욱 그랬다.  맑렷한 눈,   가지런하여 고운 치아,  적당히 각진 턱 선, 하얀 피부 하며.


 내가 여섯 살 무렵 응열은 우리 자매를 가만히 누워 신의 다리에 얹혀 비행기라며 부웅 태워 놀아주기도 하는 제법 자상한 아버지였다. 어느 날엔  휘파람을 불었던가, 그러면서 가만히 손을 내밀고 있으면 참새 한 마리가 날아와 그의 손위에 쏙 앉아 있기도 했다.  손에 앉은 참새가 행여 다치기 라도 할까 손가락 끝으로 만지는 시늉만 했던 기억이 어렴풋 난다. 어떠한 이유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 내 나이 여덟 살 무렵부터 열 살 되기까지 이전에 볼 수 없던 아버지의 방황하는 모습 사진처럼 선명하다.

 그땐 아버지가 알 수 없이 무섭기만 했다. 때를 떠올릴 때면 우리 가족들 지금 치를  ,미화씨가 여태 눈물을 쏟아내는 걸 보면. 그만큼 우리 가족에게는 지독한 시간이었을 테였다. 무엇이 그를 그토록 힘겹게 했을는지.


그런 시간 속에서도 늘 나쁘지 만은 않았다. 따뜻한 아랫목 스듬히 누워 오른발목을 왼쪽 무릎과 허벅지 즈음 에다 척 걸쳐 놓은 채. 손에는 책을 한 권 들어 그 위에 얹어 가며 들여다보곤 했다. 그걸 나도 똑같이 따라서. 그렇게 아버지와 함께 읽었던 책을 생각해 보면 꽤나 많았다. 어릴 적부터 조르는 법이 없던 나는 어쩐 일인지 책사 달라는 말은 많이 했었는데, 그때마다 아버지는 책은 사서 보는 것이 아니라 빌려보는 것이라며 정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만 되풀이했다.


어느 날  함께 버스를 타고 두 정거장 인가, 세정거장 떨어진 포남동에 갔다. "영혜. 아버지 하는 거 잘 봐. 여기서 앞으로 네가 보고 싶은 책을 빌려서 읽으면 되는 거야. 아버지가 회원카드를 만들어 줄 테니까. 이걸 잘 갖고 있어. 그리고 아까 버스 타는 거 봤지? 그렇게 타고 와서 읽고 싶은 책 빌려 가지고 오면 돼." 그러고 나서 내가 얼마큼 책방 문턱을 드나들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또렷이 기억나는 거라고는 그날 내가 기분이 무척 좋았다는 것. 아버지도 그랬을 거라는 것 정도.


아버지를 많이 닮은  내가 유난히 닮지 못한 것이 있다. 운동을 좋아하고 잘하는 타고난 능력.  남을 돕는 일 엔 칠십하나가 된 여태 오지랖을 떠는 아버지.젊은 시절 물에 빠진 시신을 수색하고 인양하는 일 또한 간혹 하곤 했다. 스킨스쿠버 실력으로 강릉에서 둘째가 라면 서럽게 소문이 자자했으니. 당연한 거였으려나. 그러니 동네에선 아버지를 물개라고 부르기도 했다. 유독 심 씨 아저씨는 김응열이라는 이름을 전혀 모르는 건지, 항상 우렁찬 목소리로 물개 있나? 물개  뭐 하나?  물개야 오늘 쉬나? 하곤 했는데, 나는 그 말이 징럽게 듣기 싫었다. 거북했달까. 초등학생나이에 어째서 그런 생각을 했던 건지 지금의 나로서는 알길 없지만 , 아무튼 우리 아버지를 물개라고 부르는 건 듣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어느 날엔  물개네 딸내미라고 나를 부르는데 그걸 듣고 기분이 몹시 나쁘기까지 했다. 지금도 나는 어느 면에서 유독 고리타분하게 꽉 막힌 구석이 있는데, 어린 시절부터  이토록 일관성 있는 데에 진심으로 박수를 쳐주고 싶기도 하다.


내가 스무 살 무렵 처음으로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방학중 집을 떠나 있을 때, 그가 이말을 했다 미화 씨가 넌지시 일러 주었. "영혜가 없으니 집이 텅 빈 거 같다."  그러다 어느 날 미화 씨에겐 말도 없이 내아르바이트하는 곳에 찾아왔다. 아버지를 보자마자 알 수 없는 서러움에 그만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다. 내가 자리를 비운뒤, 아버지는 사무실로 찾아 가 주임님을 만나 애가 힘들어하는 것 같아 보 당장 데려갈까 싶기도 하나 ,  그러지 않는 편이 아이에게 좋을 듯싶습니다. 그러니 잘 부탁드립니다. 아이가  내 얼굴을 보면 더 힘들어할 듯하여  인사는 안 하고 그냥 가겠다 전해 주십시오.  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떠났다고 한다. 그 길로 집에 돌아 간 아버지는 미화 씨에게 "들어서자마자, 우리영혜가 있는 데는 빛이 나더라."라고 말했다는 터였다. 그날  걸어 들어오는 아버지의 모습이 선명히 잊히질 않는다.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 그땐 알 수 없었지만.


 어쩐 일인지 내내  순종적 모범생이기만 했던 나는  열아홉 살 무렵 매기 시작했다. 진학을 포기하겠다는 엄포를 놓기도 했다. "김영혜 니 인생만 망가지는 거야. 모르겠나.니 인생 네가 책임져야 하는 걸. 아버지는 네가 어떻게 살든 전혀 상관없. 내 인생이냐 니 인생이지. 맘대로 해라."  그래봐야 고작 공부에 손을 놔버리는 정도였겠지만, 나로선 당시 할 수 있는 가장 큰 반항이었다. 이 턱 막혔다. 하니 공부는 커녕 내내  학비만 축내간신히 졸업을 하였다. 그리곤 일찌감찌 결혼 하게 되었다. 첫 아이는 서른이 돼서야 낳았는데 , 나를 많이 닮은 듯 닮지 않은 아이를 볼 때면 매일같이 애간장이 녹는듯하다. 어쨌든 나는 아버지가 앞으로 만일 내게 사과 같은 걸 하게 된다면 어쩐지 화가 무척 날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어린 시절 그를  미워기도 했다.  이를 낳고 기르면서부터  아버지의 마음을  비보곤  어느 날원망 따위는 지 않게 되었지만.


  "나는 네가 아버지 같은 엄마가 되지 말았으면 해. 아버지는 자라면서 한 번도 사랑을 받아본 기억이 없어. 매일같이 네 할아버지에게 두들겨 맞기나 했지. 그래서 자식에게 사랑 주는 법을 몰랐어. 이제와 보니 그게 아니란 걸 알겠. 아버지에게 억압받으며 자라면서 너 많이 힘들었잖아. 그러니 네 자식에게 그러지 았으면 해."  

어쩐지 이제는 조금 작아져버린  아버지의  손이 가만히 내 손을 잡아 쓰다듬어 준다.  내가 바닷가와 소나무숲의 마을  이야기를 써나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의 이야기 이자,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적으며 지금의 내 나이보다  젊었던 아버지를 보듬고 싶은 마음에.  멀리서 그저  숨죽여 홀로 울고 있 유난히 말수가 적었던 ,아홉 살 나에게 이제라도 그의 진심고 싶기에.  나의 글을 좋아하며 기다리고 있을  여전히 빛나는 그에게 더 늦기 전 닿고 싶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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