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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술꾼도시워킹맘 Dec 15. 2022

눈치 보지 않을 용기

멋대로 살아요. 괜찮아요.

눈치 (명사)
1. 남의 마음을 그때그때 상황으로 미루어 알아내는 것. 예: 눈치가 없다.
2. 속으로 생각하는 바가 겉으로 드러나는 어떤 태도. 예: 눈치를 주다.


태어나기를 눈치가 빠른 성미이다. 사전적 의미 그대로 남의 마음을 그때그때 상황으로 미루어 알아내기를 잘하도록 태어났다. 도마의 칼질 소리만 듣고도 엄마 기분이 별로구나, 현관문 닫는 아빠의 표정만 봐도 안 좋은 일이 있었구나. 저절로 알아채 졌다. 눈치란 자고로 좋지 않은 무드를 알아채는데에서 효용가치가 높기 마련이다.



같은 배에서 태어난 동생은 눈치가 없다. 바쁜 아침시간에도 밥을 입에 넣고 5분째 오물거렸다. 다리를 달달 떨면서. 아빠의 분노 게이지가 점점 차오르는 것 같다는 눈치 따위는 없다. 옆구리를 푹 찔러도 알아채지 못한다. "아 왜~~~~~" 하는 더럽게 눈치 없는 대답만이 돌아올 뿐. 타고나길 남의 눈치를 살피지 않는 동생은 지나가다 먹고 싶은 건 다 사 먹어야 하고, 비싼 옷 사달라고 조르기도 잘했다. 눈치가 빤한 나는 옆에 서있기만 하면 콩고물이 떨어진다는 걸 알았다.



눈치챔이 빠른 아이로만 살았으면 좋으련만
지나치게 남의 눈치를 보며 살았다.




대여섯 살 즈음이었던 것 같다. 버스에 탔다. 마침 빈자리가 있어 엄마도 나도 한 자리씩 차지하고 앉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할머니 한 분이 버스에 올라 나를 향해 걸어오시더니 내가 앉은자리에 엉덩이부터 쓰윽 들이미시는 게 아닌가. "아이고, 쪼그만 게 혼자 이리 앉아있누, 할미랑 같이 앉자." 하시며. 뭐, 쪼그만 아이 혼자 자리를 턱 차지하고 앉아있으니 같이 앉아도 되겠다 싶으셨나 보다. 그럴 수 있겠다 싶다. 요즘이라면 엄마들이 기겁할 일이겠지만 (모르는 타인이 내 아이를 터치하는 것 자체부터 말이다.) 건너 자리의 우리 엄마는 마치 당연히 그래도 된다는 듯 가만히 있었다. 싫었다. 꼬맹이었지만 내 마음은 분명 싫다고 말하고 있었다. 아무 말도, 어떤 행동도 하지 못했다. 그냥 일어나서 엄마 무릎에 가서 앉았어도 될 것을, 싫어요 한마디 하고 엄마에게 도움을 요청해도 되었을 것을. 모르는 할머니와 같이 앉기 싫었지만 내색도 못하고 얼음이 되어 앉아 있었다. 내가 일어나면 할머니가 섭섭해하시려나 따위의 생각은 없었지만 누군가에게 내가 싫은 티를 내는 것 자체가 눈치가 보였던 걸까.



필기를 잘했다. 눈치 빠른 성미와 함께 성실함의 기질을 타고났다. 시험기간이 되면 필기 노트의 인기가 높아졌다. 너도 나도 찾아와 필기노트를 빌려달라고 했다. 중,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은 물론이고 대학에 가선 선배들까지. 싫었다. 지들이 책상에 엎어져 자고 수업 빠지고 노는 동안 자고 싶은 거, 놀고 싶은 거 참으며 쓴 노트였다. 빌려주지 않겠다 하면 이기적인 애라 생각하겠지, 쪼잔하게 노트 필기가 뭐라고 빌려주기 싫어하는 못된 애라고 수군대지 않을까 눈치를 봤다. 싫은 거 꾹 참고 빌려줄 수밖에. 그러다 보니 어떤 인간은 시험 때마다 당연한 본인의 권리라도 되는냥 아무렇지 않게 빌려가기도 했다.



회사를 다니면 거절을 해야만 하는 일이 생긴다. 우리 팀 업무가 아니어서, 요구하는 일정이 터무니없어서 등등 이유는 많다. 태생이 소심해서일까. 누군가에게 일로 부탁을 하는 게 쉽지 않은 나는 누군가의 요청을, 부탁을 거절하는 것이 어렵다. 나처럼 어렵게 얘기했는데 거절하면 속상하지 않을까, 일도 제대로 모르면서 싸가지 없다고 욕하지 않을까. 걱정도 가지가지다.


내 기분은 모른 체하게 되는 몹쓸 놈의 눈치




난 왜 이럴까 하면서도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이렇게 살게끔 태어난 것처럼, 단지 생각 만으로 바뀌는 게 아니었다. 10대, 20대, 30대를 지나오며 눈치가 빠르지만, 눈치를 너무 보는 스스로를 인지하며 살았다. 그렇게 40대가 되었다. 어렸을 땐 20대가 되면 어른이 되는 줄 알았고, 30대가 되면 드라마에 나오는 것 같은 커리어우먼이 될 줄 알았다. 40대가 되면 고리타분하지만 세상의 섭리를 조금은 이해하게 되는 진짜 어른이 되는 줄만 알았다. 40대가 되고 난 뒤 알았다. 변하는 게 별로 없다. (피부 탄력이 떨어지고 다이어트를 해도 살이 쉽게 빠지지 않는 등의 신체적 노화가 가속된다는 거 정도일까) 40대가 되었지만 생각했던 어른이 아니었다. 이러다 금방 50대, 60대가 되고 어른이 뭔지, 내가 철이 들긴 하는 것인지, 세상을 통찰하는 따위의 어른의 감정은 느껴보지 못한 채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겁이 났다.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 어른이 되는 것은 포기하더라도 내가 누구인지, 나는 어떤 색깔인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는 알아야겠다 싶었다.



바쁘게 살아온 탓일까,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아온 탓일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 남들에게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는 대충 알겠는데 말이다. 나를 방치하며 살아왔던 시간을 반성하며 내 마음에 귀 기울이기로 했다. 작은 것부터 남의 눈치보다 내 마음을, 내 기분을 챙겨보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생기는 삼삼오오 모임들 중 유독 누군가의 뒷담화 하길 좋아하는 멤버가 주축인 모임이 있었다. 헤어지고 나면 기가 빨리고 녹초가 되는 게 싫었지만 빠질 핑계를 찾지 못해, 내가 빠지면 내 욕을 할까 봐 거절하지 못하고 참석했었다. 연말이 되니 한 번 모이자는 얘기들이 단톡방에 오간다. 이번엔 싫었다. 연말이라 약속이 많고 남편과 시간 조율이 어려워 가지 못한다고 전했다. 내 욕 하면 어떠랴. 평생 보고 살 사람들도 아니건만.



매 계절 옷을 사는데 왜 입을 옷이 없는 것인가. 인터넷 쇼핑으로 옷을 살 때마다 남편 눈치를 봤다. 택배 상자가 오면 뭐 샀냐고 물어볼까 신경 쓰였다. 내 돈 벌어 내가 사면서도 왜 눈치를 봤을까, 물어보면 옷이라고 대답하면 될 것을. 심지어 집으로 택배가 오는 게 눈치 보여 회사에서 받아 하나씩, 하나씩 나눠서 가져갔다. 마치 집에 있었던 것처럼. 옷 몇 벌 사는 게 007 작전도 아니고 고작 몇만 원 하는 옷을 사면서 말이다. 이제 그러지 않기로 했다. 택배가 왔다. 그제도, 오늘도.

“택배 왔네. 뭐야?”

“내 옷.”

“어.”

그게 다였다. 눈치 볼 이유가 없었다. 심지어 그는 숨겨서 가지고 온이 새 옷인 줄 눈치 채지도 못한다. (눈썰미가 더럽게 없다.)



워킹맘, 슈퍼우먼,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 일하는 엄마가 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사회에서 요구하는 그런 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던 걸까. 아이의 아침을 부실하게 차려주면서, 주말에 밥 하기 싫어 배달음식을 시켜 먹으면 눈치가 보였다. 사실 남편은 살림꾼의 모습을 요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데 말이다. 밥 하기 싫은데 해야 할 것 같아서 하고, 하면서도 내키지 않아 짜증내고, 그런 나를 보며 남편은 내 눈치를 보고 악순환이었다. 이제 당당하게 얘기한다.

“엄마 오늘 힘들다. 외식하자.”

  




시도해보니 사실 별것도 아니다. 별것도 아닌데 왜 그리 눈치를 보고 살았나 모르겠다. 이제 내 눈치를, 내 마음을 살피며 살아가려고 한다.

눈치 보지 않고 휴가 쓰고, 퇴근하고

눈치 보지 않고 외식하고, 쇼핑하고

눈치 보지 않고 입고 싶은 대로 입고, 하고 싶은 거 하고

눈치 보지 않고 책도 읽고, 글도 쓰고, 꿈도 꿀 테다. (내 글을 읽으며 남들이 뭐라 생각할지 눈치 보지 않고 막 써보기로 다짐한다.)



이미지 출처 : Unsplash

블로그 : blog.naver.com/1012wh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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