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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이 Nov 26. 2022

나의 가난과 그리고 외로움 - 2

혼자인 사람

 새어머니와의 다툼 후, 집에서 쫓겨나듯 출가한 곳에서 나는 우여곡절 끝에 중학교를 마치게 되었다. 아버지 사업 실패로 드리운 경제적인 어려움과, 외로움의 그늘 아래에서 나는 시들 법도 했는데 이상하게 잡초처럼 억척같이 살아남았다. 나는 내면적으로 어둡고 우울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여느 사춘기 학생들과 같이 밝고 명랑한 구석도 많았다. 방세가 계속 밀린다거나, 하숙집 사장님께 혼이 나거나, 생활비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도 친구들과 있을 때는 무엇이 즐거웠는지 항상 깔깔 웃으며 다녔다. 생각해보면 이건 내 선천적인 기질이 낭창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은데, 만일 내가 조금 더 좋은 가정환경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랐다면 정말 밝고 주변 사람들을 환하게 비추는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싶어 조금 마음이 아프기도 하다.


 또 우리 집 사정이 창피하거나 기죽을 법도 했는데, 당시의 나는 힘든 상황이 닥치면 무조건 친한 친구들에게 엉엉 울며 사정을 모두 털어놓고 의지했다. 물론 내 상황은 당시 친구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은 아니었지만, 항상 친구들은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주고 함께 마음 아파해 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나마 무엇인가를 붙들고 감정을 해소했던 행동들이 나를 살리는 일이 아니였을까 싶다. 내가 용기 내어 친구들에게 고민을 털어놓지 않았더라면, 울며불며 감정을 토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진작에 속이 병들어 지금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고등학교를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가 베트남에서의 생활을 포기하고 홀로 돈을 벌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베트남에서 어떻게든 다시 사업을 일으켜보려는 아버지의 몇 년간의 노력이 별다른 결과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아버지는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가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만 했다. 그렇게 아버지가 한국으로 옮겨간 지 1년이 채 안 되었을 무렵, 아버지는 연락도 닿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버지의 번호로 전화를 걸면 발신이 불가능한 번호라는 안내음이 들렸다. 아버지와 연락이 닿지 않는 건 새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일순간 고아가 된 느낌이 들었다. 형제도 자매도 없는 나는, 어머니도 계시지 않는 나는, 아버지가 한 달이 넘게 연락이 닿지 않자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이대로 한국으로 돌아가, 아무도 나를 환대하지 않을 친척집으로 가 또다시 군식구가 되어야 하나? 아니면, 고아원으로 가 아버지와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그러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되는 건가?


 당시 나는 여태 우여곡절을 겪으며 살아왔지만, 이 사실만큼은 도저히 받아들이기가 어려워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였다. 다른 것들은 모두 친구들에게 털어놓던 나 조차도 이 사실만큼은 쉽사리 말하기가 어려웠다. 범하게 학교를 가 수업을 듣고,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은 동일했지만 몸과 머리가 분리된 것처럼 도저히 일상생활에 집중을 할 수도 없었고 친구들과 대화할 때도 마음 한편에 불안이 가득했다. 그렇게 집세 내는 날은 또다시 돌아왔고, 급한 대로 새어머니에게 집세를 내야 한다고 연락했지만 답은 없었다. 그리고 사촌언니를 통해 친척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렸지만 별다른 조치는 없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시 다니던 교회의 전도사님을 찾아가 상담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말했다. 전도사님은 나와 또래인 자녀가 있는 아주머니였는데, 그래서 그런지 어머니처럼 느껴져 이 사실을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전도사님은 내 이야기를 듣더니, 우선 학교에도 이 사실을 알리라고 하셨고, 교회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있는지 알아보겠다고 하였다. 그렇게 나는 교회와 학교 선생님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은 돈을 매 달 지원받아 생활할 수 있었고, 교회에서는 우리 아버지를 찾기 위해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교회의 담임 목사님은 호치민 영사관에 우리 아버지의 정보를 전달하고 출입국 조회를 했으나 입국이나 출국 기록은 없다는 결과를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실종신고를 진행한다고 했다. 나는 '실종신고'라는 마치 텔레비전에서나 나오는 심각한 단어를 들을 때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실종신고. 


 나는 내가 한국에서 다니던 친한 교회 선생님께도 이 사실에 대해서 이메일을 썼다. 선생님은 교회에 이 사실을 알렸고, 한국 교회 담임 목사님도 내가 베트남에서의 생활이 더 이상 불가할 경우 한국으로 돌아오라고 하였으며, 교회에 거처를 마련해 지낼 수 있도록 해 주신다고 했다. 또한 학비나 생활비 등을 지원해 내가 고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연락을 받았다. 


 완전히 끝난 것 같았던 내 인생이 주변의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아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연락은 계속 닿지 않고 있었지만 지금 당장의 큰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기에 생활은 다소 안정을 찾았다. 그러나 나는, 이런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런 불쌍한 사람이 처지가 너무나도 부끄럽고 죄스러웠다. 나는 아무런 잘못도 없었지만, 마치 내가 원래는 존재하면 안 될 것 같은 사람이 된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이런 모든 상황 자체가 당시 어렸던 나에게는 스스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나에게 도움을 주고, 도움을 주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함을 느꼈지만, 알 수 없는 마음의 부채감과 여전히 연락이 닿지 않는 아버지가 종종 생각나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나는 이때 많은 사람들과 트러블을 겪었다. 나는 당시 고슴도치처럼 항상 날이 곤두서 있었고, 아주 예민해서 조금만 건드려도 쉽게 화나 짜증을 냈다(당시에는 몰랐지만 알고 보니 이런 나의 상태는 '비정형 우울증'의 한 양상이라고 한다). 친했던 친구 중 감수성이 풍부하고 남의 말이나 행동에 상처를 잘 받는 타입의 친구가 있었는데, 알게 모르게 내 당시 말투나 행동에서 여러 번 상처를 받았던 모양이었다. 나는 이 사실을 모른 채로 계속 예민하게 행동했고, 친구는 계속해서 쌓여가고 있었던 것 같다. 


 친구는 나에게는 이 사실을 말하지 않고, 주변의 다른 친구들에게는 모두 나의 이야기를 했다. 그때 당시 내가 도움을 받았던 교회를 함께 다니던 친구였는데, 그 교회의 중고등부 담당 목사님, 교사 선생님께도 모두 나의 이야기를 했다. 나는 어느 순간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나를 피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중에 기회가 되어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 일 때문에 예민했던 것 같다며 솔직하게 사과했지만(예민해서 까칠하게 말했던 것은 맞지만 도덕적인 잘못이나 심각한 행동은 결코 없었다) 그다지 진심으로 들리지 않았는지 어느 순간 돌아보니 몇 친구들은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나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교회에 있는 대다수의 어른들이 그 친구 어머니께 말을 전해 듣고 나를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시하거나 빈정거리는 태도로 나를 대했다.


 아버지는 그로부터 3개월 뒤에 다시 연락이 닿았다. 전화가 걸리지 않았던 핸드폰은 다시 수신음이 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아버지께 묻지 않았다. 물을 용기도 없었다. 학교에도, 교회에도, 한국의 목사님께도 이 사실을 다시 알렸다. 아버지는 다시 돈을 보내주셨다. 나중에 들어보니 당시 아버지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귀국하여 아파트 경비원 일을 하면서 생활하였다고 한다. 핸드폰 요금도 내지 못해 전화가 끊기고, 힘든 상황에서 부쳐줄 수 있는 돈이 없어 미안함에 연락을 하지 못하였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고아는 되지 않았지만, 이 일 이후로 나는 마음에 하나의 큰 상처가 더 새겨진 기분이었다. 힘든 상황에서 주변 어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정말 감사한 일 중 하나이지만, 당시 느꼈던 고통스러운 감정과 알 수 없는 죄책감은 지금 생각해도 감당하기 어렵다. 또 그 상황이 너무 벅찼던 어린 나의 혼란한 감정이 고스란히 주변으로 흘러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남기고, 그 사건으로 인해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영문도 모르는 나를 적대시했던 경험은 나에게 큰 상처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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