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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ringsnow Aug 13. 2023

바람의 노래

언젠가는 알게 될까




"살면서 듣게 될까 

언젠가는 바람의 노래를

세월 가면 그때는 알게 될까 

꽃이 지는 이유를..

나를 떠난 사람들과 만나게 될 또 다른 사람들

스쳐가는 인연과 그리움은 어느 곳으로 가는가

나의 작은 지혜로는 알 수가 없네."


요즘 출퇴근길에 한 번씩은 꼭 듣는 "바람의 노래"라는 곡의 가사다.


정말 알게 될까? 내가 살아온 시간들과 그렇게 흘러가야 했던 많은 일들의 이유를.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어도 최소한 내가 지나온 삶의 부분들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정도는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요즘 이 노래를 듣다가 문득 아주 오래전 장면이 눈에 스쳤다.

할머니와 언니와 함께 살던 시골마을에서 언니가 묵직한 가방을 한쪽 어깨에 메고 떠나가던 그날의 장면이.




언니가 가방을 쌌다. 덩치 큰 남학생이나 멜 법한 커다랗고 기다란 가방 안에 옷가지와 소지품들을 차곡차곡 담고 있었다. 옆에서 아무 말없이 무심한 듯 지켜보고만 있었던 것 같다. 사실 못마땅한 마음이 커서 어떤 말도 건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이곳에 나를 두고 혼자 그렇게 홀가분하게, 그것도 나보다 먼저 탈출한다는 것인가!

대학이 아닌 상업고등학교를 가겠다는 언니에게 "너는 자존심도 없냐?"며 모진 말들을 퍼부었었다. 친척들 앞에서 당당하고 그럴싸한 모습으로 커야 하는데 상업고등학교라니! 쓸데없는 나의 오기와 자존심이 참으로 부족하게 차오르던 시기였으니 내가 얼마나 날카로운 말들을 언니에게 쏟아냈을지는 지금은 뚜렷이 기억이 나지 않아도 알 만하다. 그런 언니가 고등학교를 마치기도 전에 경기도에 있는 전자회사에 취업이 되어 가게 된 것이다. 4살 때부터 키운 손녀가 이제는 제 앞가름을 하겠다며 가방을 싸고 있는데 할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이제 혹 하나는 떼었으니 작은 한숨을 내쉬셨으려나, 하기야 철없는 나는 기어이 4년제 대학에 들어가겠다며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 앞으로 보낼 긴 시간 앞에 할머니는 아직 한숨을 돌려 쉴만한 여유가 없었으리라.


다음날 아침 언니가 무거운 가방을 한쪽 어깨에 척 올려 메고는 집을 나섰다. 가는 길을 배웅하기 위해 시골길을 따라 나도 기차역으로 따라나섰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도 15분은 족히 걸리는 기차역까지 언니와 나는 별말 없이 그저 조용히 걸었다. 

"갈게." 언니의 나지막한 한마디.

그리고 짧은 내 한마디 "어."

기차가 들어오고 있는 선로를 향해가는 언니의 뒷모습을 보며 우두커니 한참을 서있었다.

눈에서 맑은 물이 자꾸 흘러나와서 여간 성가신 것이 아니었다. 언니가 가는 모습을 담담하게 지켜보고 돌아서야는데 이 몹쓸 눈물이 마음을 왜 이리도 서럽게 만드는지. 

저만치 멀어진 언니가 한번 주춤 서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서로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만큼 먼 거리였기 때문에 나는 그저 한 팔을 들어 손을 흔들어주었다. 절대 눈물을 닦진 않았다. 나만 알아야 하는 눈물이니까.


언니가 4살, 내가 3살. 어떤 선택도 할 수 없었던 연년생의 어린 자매가 이 시골마을에 와서 결코 즐겁지만은 않은 짙은 시간을 살아내고 어느덧 20살이 되어 언니는 그렇게 먼저 이곳을 떠나갔다.

어린 시절, 명절에 친정을 찾아 내려온 고모 한 분이 언니와 내게 참으로 다정한 듯 차가운 말을 했다.

"난 너희들이 우리 엄마 짐이라고 생각하진 않아."

'아! 우린 짐이구나.' 그 순간 바로 깨달았다. 그렇게 '짐'이라는 단어는 꽤 무겁고 버거운 의미의 말이라는 것을 깨달아 버린 날이었다. 우리를 감당해 주신 할머니에게도 고달픈 시간이었겠지만 언니와 나에게도 일부 짐 같은 무거운 시간이었음을 이제는 고백해 본다.

그리고 20살이 채 되기도 전에 언니는 자신의 짐을 찾아 혼자 감당하기 위해 그렇게 떠나갔다.

홀가분했으면 했다. 이곳을 등지고 가는 언니의 마음이. 

 

나는 내 욕심과 고집대로 4년제 대학에 들어갔고, 방학 때가 되면 언니 자취집에 가서 백수처럼 뒹굴거리다 오기도 하면서 마치 우리만의 아지트가 생긴 듯 참으로 편한 시간을 보내곤 했다. 내 기억에 그때가 언니에게는 경제적으로 가장 넉넉한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만나면 종종 대학생활에 대해 말하는 나를 보며 살짝 부러워하는 듯한 언니의 내색이 스치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 날 묵직하게 꺼내놓는 언니의 말에 나는 뒤통수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듯 순간 멍해지는 기분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그때 대학에 간다고 했으면 할머니가 너를 대학에 보낼 수 있었을까? 할머니가 대학에 둘이나 어떻게 보내."

나의 지독한 이기심과 아집에 도끼를 내리꽂듯 무너져내리는 기분이었다.


20살이 된 언니는 그렇게 본인의 삶을 찾아 스스로 선택하고 기꺼이 간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언니의 한쪽 어깨를 짓눌렀던 커다란 가방만큼이나 그 순간에도 언니는 언니가 선택할 수 없는 무거운 삶의 짐을 그저 감당하며 간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언니에게 나도 모르는 큰 빚을 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미 마흔이 넘어버린 우리는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나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언니는 여전히 혼자 살아가고 있다. 혼자 산 지 어느덧 20년. 시골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순간들을 모두 덮을 수 있을 만큼의 시간 동안 혼자 살고 있다.

우리가 받아내야 했던 시간들의 답을 언니는 조금은 찾았을까? 가볍게 털어낼 수 있을 만큼의 이유는 찾았을까?


언니가 나보다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 되기를. 나보다 더 멋지게 살아내는 사람이 되기를. 

이제는 혼자 아파하는 사람이 아니기를 조용히 기도해 본다.

그래야 언니에게 진 내 빚을 조금은 깎아달라고 말할 수 있을 텐데.



"언니 미안해. 잘 살아줘. 나도 안간힘을 다해 노력 중이니.

우리 그런 자격은 가지고 살아가자.

.

그리고 정말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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