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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ringsnow Sep 24. 2023

호박댓국 한 그릇 어디에서 먹을 수 있을까요




나흘째 비가 내리고 있다. 유난히도 뜨겁고 힘들었던 여름이 이제야 물러가나 했더니 장마철도 아닌 가을의 초입에 장대 같은 비가 쏟아지고 있다.

오늘은 또 뭘 해서 저녁상을 차릴까  날도 축축하고 몸도 개운치 않으니 오랜만에 시원한 된장국을 끓여볼까 생각이 드는데, 늘 냉장고 한편에 있던 두부도 오늘따라 보이지 않고.

야채칸을 뒤적이다 남편이 사다 놓은 호박잎이 보였다. 내가 호박잎쌈을 좋아하니 종종 사다놓긴 하는데 사 왔으면 푹푹 쪄내서 얼른 줄 것이지 사 오는 마음까지 만이다. 사다 놓은 지가 그새 며칠이 지났으니 잎사귀 끝이 거뭇거뭇 색이 바래있었다. 호박잎으로 국은 아직 한 번도 끓여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끓이는 건가 인터넷을 찾아보다가 문득 첫아이를 임신해서 입덧을 했던 때가 생각이 났다.




지독해도 렇게 지독 수가 있을까. 첫아이를 임신하고 3개월째부터 시작된 입덧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밥 한 숟가락만 입에 넣어도 곧장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를 붙들고 씨름을 해야 하니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몇 주째 제대로 죽 한술도 편하게 넘기지를 못하니 얼굴은 초췌해지고 몸도 마음도 바닥으로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병원에 갈 때마다 아기는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고 하니 나만 견뎌주면 되는 일이긴 했으나 그 시간이 정말 다시는 되돌리고 싶지 않을 만큼 너무나 호된 시간이었다.

그렇게 제대로 밥도 못 먹고 특히 기름진 음식은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쳐지는 그 시기에 마음속에 간절히 생각나는 음식 하나 있었다. 어린 시절 할머니가 끓여주시던 호박댓국이었다.

서울토박이였던 남편은 아무리 설명을 해줘도 가늠도 하지 못하는 그 시골음식을 만들어달라 할 수도 없고 호박댓국을 파는 식당도 있을 리 만무했다.




뜨거운 여름 해가 저물고 하늘에는 뭉근한 구름들이 퍼져가고 있는 초저녁 무렵,

할머니텃밭에서 호박잎과 동그란 호박을 툭툭 끊어내어 소쿠리에 한가득 담아 오셔서는 마루에 툭 내려놓으신다. 언니와 내가 바구니를 붙들고 앉아 까슬거리는 호박대의 껍질을 벗겨내면 할머니는 마당 시암(전라도 사투리, 우물)으로 소쿠리를 들고 가서는 곱게 벗겨 호박잎과 줄기를 바닥에 박박 치대며 초록물을 씻겨낸  시암 한에 터줏대감처럼 올려져 있는 동그란 돌을 집어 들어 호박들을 탕탕 내리치신다. 야무지게 여문 동그란 호박들을 칼로 매끄럽게 잘라내지 않고 돌로 자근자근 부셔주면 오히려 그 투박한 모양에서  더 달큰하고 고운 맛이 나는 했다.

구수호박댓국 할머니는 대체 무엇을 넣어서 맛을 내셨던 걸까? 된장, 고추장, 간장 모든 양념 마당 장독 안에서 직접 다 만들어진 것이니 그 맛을 마트에서 사다 먹는 된장과는 어디 견줄 수도 없겠으나, 어떻게 해야 그 맛을 흉내라도 내볼 수 있을까?  끔찍한 입덧을 하는 내내 그 소박한 음식 하나를 먹지 못한다는 게 그리도 서러울 수가 없었다.

호박댓국뿐만 아니라 나에게는 '어린 시절, 할머니, 시골마을 그리고 여름'이 네 가지가 한 대 모여야만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이 있다.



여름 볕이 제법 짱짱해졌다 싶을 때가 되면 어김없이 할머니는 김부각을 만드셨다.

일장에서 미리 잔뜩 사다 놓은 김이 나보다 먼저 일어나 마당에 나와있는 날이면 아침상을 물리자마자 며칠간의 긴 여정이 시작된다. 할머니는 마당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두세 장의 김을 겹쳐 곱게 끓여놓은 찹쌀풀을 척척 발라내면, 언니는 풀옷을 입은 김이 접히지 않도록 살살 들어다가 미리 깔아놓은 대나무자리에 살포시 올려놓는다. 마지막은 내 차례다. 한 손에 고춧가루와 통깨를 섞어놓은 대접을 들고 다른 손 검지손가락으로 그것을 콕콕 찍어 네모난 김 위에 곱게 곤지를 찍어내듯 올려주면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허리를 구부리며 찍어낸 김부각은 초여름 볕에 바짝 말라 바스락바스락 맛있는 소리를 낸다. 그 많은 부각들은 커다란 비닐과 포대자루에 차곡차곡 담겨 타지에 있는 할머니 아들딸 다섯에게 보내진다. 그리고 몇 장 남겨놓은 부각을 기름에 튀겨내어 찬물에 밥 말아 함께 먹으면 다른 반찬이 필요 없을 만큼 어린 입맛에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고들빼기와 고구마줄기 김치도 그런 음식들이었다. 호박댓국을 끓이기 위해 호박을 흠씬 두들겨 팼던 그 매끄러운 돌은 쓴 물을 빼기 위한 용도로 고들빼기 위에 올라앉아 있기도 했다. 그렇게 며칠을 눌려 기가 꺾인 고들빼기에 붉은 양념을 척척 발라 김치를 담그면 쌉싸름하면서도 여간 개미 있는 맛이 아니었다(전라도 사투리, 맛에 깊이와 감칠맛이 있다). 고구마줄기도 마찬가지다. 마당에 포장을 깔고 포대자루에서 쏟아내는 고구마줄기를 동네 할머니들과 둘러앉아 등을 굽었다 폈다 하며 하루를 꼬박 껍질을 벗겨낸다. 나올 때는 포대자루 넘치는 양이었으나 껍질 벗겨 김치양념에 절여놓으면 작은 김치통 몇 개 차지 않는 적은 양이 된다. 그것 또한 끈으로 꽁꽁 싸매 할머니의 아들딸들에게 보내지고 작은 반찬통에 남아있는 얼마 남지 않은 줄기김치를 귀하고도 맛나게 먹어본다.



어른이 되 혼자 자취를 하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이 음식들은 단 한 번도 해먹지도, 사 먹지도 못했다. 물론 김부각이나 고구마줄기 김치는  찾으면 사 먹을 수 있는 음식이기도 했지만 왠지 어린 시절 먹었던 그 맛이 아니라는 냉정한 판단으로 사 먹지 않았다.


아무리 사 먹는 곶감 맛있다고 한들 어린 시절 할머니 몰래 처마 끝에 까치발 들고 몰래 따먹던 그 맛을 따라올 수 있을까, 매일 아침저녁 솥밥으로 나오는 누룽지를 박박 긁어 기름에 튀겨내고 한 주먹 크게 설탕을 뿌려주면 세상 아무리 달콤한 음식이 그 맛을 이길까

할머니는 김치도 아닌 것이 냉장고에 한 번 들어갔다 나오는 반찬은 두 번 다시 밥상 위에 올리지 않으셨고 조금이라도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은 시암바닥에 내쳐버리셨다. 우리 할머니는 지금 생각하니 음식한테도 참 인정이 없었네. 결국 이 까다로운 입맛은 내 머리와 혀끝 어딘가에 남아 계절이 바뀌고 때가 되면 그때 그 시절의 맛을 아른거리게 만들면서 결코 채우지 못하는 아쉬움과 허전함이 되어버렸다.

우리 할머니 참.. 지독하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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