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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ringsnow Oct 18. 2023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여전히 담아가며 살아갑니다.



나의 마음속에 항상 들려오는

그대와 같이 걷던 그 길가의 빗소리

하늘은 맑아있고, 햇살은 따스한데

담배연기는 한숨 되어

하루를 너의 생각하면서

걷다가 바라본 하늘엔

흰구름 말이 없이 흐르고

푸르름 변함이 없건만

이대로 떠나야만 하는가

너는 무슨 말을 했던가

어떤 의미도 어떤 미소도

세월이 흩어가는 것

어느 지나간 날에 오늘이 생각날까


이문세  - 그녀의 웃음소리뿐 -




올 가을 이문세의 노래가 다시 귀에 꽂혀서 무한 반복 듣고 있는 중이다.

어린 시절 할머니댁 작은 방에는 삼촌의 LP판과 노래 테이프들이 가득했던 것으로 얼핏 기억이 난다.

그중에서도 삼촌의 방문 틈으로 듣는 이문세의 노래는 어린 귀가 듣기에도 참 따뜻하고 아련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은 한참 1세대 아이돌 가수에 열광할 때 나는 여전히 이문세의 노래에 기대어

그 시기의 무력감을 잠시 내려놓곤 했었다.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니 올해 유난히 결혼소식이 많이 들려온다.

그중에서도 그 당시 나의 삼촌, 지금은 세 아들을 둔 작은 아빠의 첫째 아들 결혼소식이 전해왔다.

서울에서 일요일 오후 2시가 넘는 시간에 결혼식이라니.

요즘엔 어지간해선 일요일에는 결혼식을 잡지 않던데. 주말 근무를 하는 남편은 어쩔 수가 없으니 혼자 아이들을 데리고 다녀오기 위해 기차표를 예매했다. 다음날 무거운 월요일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 걱정이 되긴 했지만 안 갈 수는 없으니 결혼식에 입혀갈 아이들 옷이나 단정하게 준비해야겠다.

'주말에 결혼식에 가면 오랜만에 친척분들도 뵙고 작은 아빠도 보고, 아빠도 보고.. 그러겠구나' 일을 하면서 한 번씩 생각이 스치긴 했지만 전처럼 속이 시끄럽지는 않은 걸 보니 이제는 제법 무딘 살이 입혀졌구나 생각해 본다.

대학교를 졸업 후 직장인이 되고 혼자 지내면서도 집안에 행사가 있을 때면 그래도 도리는 하면서 살아야 하니 불편한 마음을 안고 꾸역꾸역 참석을 했었다. 하지만 가서 말 한마디 편하게 못하고 한쪽에 앉아있는 내 몸뚱이만큼이나 마음도 자리를 잡지 못하고 쭈뼛쭈뼛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억지로 그 틈에 끼어 내 한자리는 있는 듯 앉아있다 왔지만 돌아오는 길은 늘 '괜히 갔나..' 하는 마음이 들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까지도 난 여전히 누군가에 의해 길러져야 하는 힘없는 아이의 마음이었나 싶다.


결혼식이 며칠 남지 않았는데, 점심을 잘못 먹은 건지 일을 하다가 배가 꼬이고 속이 좋지 않아 결국 조퇴를 하고 집으로 왔다. 다행히 오늘따라 일찍 퇴근을 한 남편이 아이들 저녁을 챙겨주고 나는 새우처럼 몸을 웅크리고 누워 밤새 고생을 하다가 다음날 아침, 일찍 여는 병원을 찾아가 진료를 봤다.

의사 선생님이 심하게 체한 것 같으니 수액을 맞고 가라고 하셨지만 출근을 해야 하니 묵직한 약봉투만 받아 들고 출근을 했다. 죽만 먹어도 배가 콕콕 찔러 3일 동안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그렇게 빼려고 기를 써도 안 빠지던 살이 며칠 사이에 2킬로가 빠진 걸 보니 어이가 없기도 하면서 결혼식에 좀 더 날씬하게 갈 수 있겠구나 속없이 좋기도 했다. 며칠 째 신경 써서 약을 챙겨 먹는데도 쉽게 속이 편해지지가 않고 주말이 되었다. 양손에 두 아이를 하나씩 잡고 예식장에 들어섰다. 하객도 많지 않고 일요일 예식이어서 그런지 예식장이 한산했다. 신랑 측 데스크 옆에 여전히 나에게는 너무나 큰 작은 아빠가 양복을 입고 서있다. 내 어린 시절을 함께 해준 고등학생 삼촌이 이제는 얼굴에 검버섯이 핀 나이 지긋한 아버지로 그 자리에 서있었다. 그리고 오늘 결혼식의 주인공, 작은 아빠의 첫째 아들이 듬직하게 그 옆을 지키고 서있었다. 왜 이렇게 살이 쪘는지 퉁실한 청년이 다 되어 있었다. 어릴 적 작은 아빠가 결혼을 해서 아이들을 데리고 시골에 오는 주말이면 할머니는 어김없이 언니와 나에게 아이들이 먹을 과자며 요구르트, 간식거리들을 사다 놓게 하셨다. 평소에 과자 사 먹으라고 돈 한번 주지 않는 할머니에게 유일하게 단냄새를 맡을 수 있는 날이었다. 애들 과자를 몰래 먹다가 한소리 쥐어박히기도 했지만 그래도 어쨌든 나에게도 좋은 날이긴 했다. 그런 아이가 벌써 이만치나 커서 장가를 간다고 서있으니 세월이 흐르긴 흘렀구나.




결혼을 하고 나도 '내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생겼다. 남편이라는 내 편이 생겼고, 어디에도 떼어 놓을 수 없는 금쪽같은 두 아이가 생겼다. 가족이 생긴다는 것이 이렇게 든든하고 좋은 것이었구나. 어디에서든 혼자 있지 않아도 되고,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망설이며 어색하게 웃지 않아도 되었다.

그저 내 아이들을 바라보고 내 아이들에게 열심히 하는 엄마이면 어디에서든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제야 비로소 다른 사람들의 웃음이 보였다. 나를 향해 그저 심통치 않은 뾰족한 표정만 있을 거라 생각했던 그들에게서 나를 향해 격려하고 웃어주는 얼굴이 보였다. 과거에는 서로에게 어떤 불편함과 못마땅함이 있었던들 지금 나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고, 그들 역시도 그들만의 희로애락으로 삶을 채워가고 있을 뿐이었다.

가길 잘했다. 괜히 간 것이 아니었다. 열심히 그리고 꾸준히 가족이라는 끈을 붙들고 갔으니 지금의 이 시간도 있는 것이 아닌가.

불편함과 어려움에 눌려 그 자리에 머물러만 있었다면 나는 여전히 보지 못했을 텐데, 그래도 이를 악물고 한발 한발 걸어왔으니 나는 지금 여기에 와있는 것이다. 이제야 비로소 든든한 내 자리를 딛고 서있는 듯 하다.

잡지 않고 보지 않았으면 결코 담지 못했을 것들을 조금씩 품에 담으며 따뜻함을 느껴본다.

직장 생활하면서 누구 도움 없이 혼자 두 아이 키우느라 고생한다는 작은 고모의 말도, 아이들하고 기차 타고 가면서 간식이라도 사 먹이라고 손에 봉투를 쥐어주시는 큰고모의 손길도 나는 모두 기꺼이 담았다.


누가 알았겠는가. 스무 살 중반까지 누워서 양팔을 벌리면 손끝으로 차가운 컨테이너가 느껴지는 고시원에 살았던 내가 훗날 이렇게 귀한 두 딸을 손에 잡고 가슴 펴고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것을 누가 알았겠는가.

그냥 가는 것이다.

모르지만 그냥 가다 보면, 조금은 더 옳은 길이라고 여겨지는 쪽으로 조금씩 힘을 내서 가다 보면 훗날 내가 얼마나 귀한 것을 쥐고 살아가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

몇 년 후의 나 역시도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결론 나지 않았다.

없는 것을 찾기 위해 헛된 발을 구르기보다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더 꽉 붙들고 가면 되는 것이었다.

몸은 컸지만 여전히 기댈 곳을 찾아 헤매던 어린 나는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진짜 어른이 되어 가고 있는 중이다. 과거의 내가 아닌 '지금 이 순간의 나'로서.

이런 자리에 와도 아빠와 그 가족들이 앉아있는 테이블을 신경 쓰며 불편하게 엉덩이를 들썩이지 않아도 될 만큼의 나이도 먹었다. 아빠와 살고 있는 그분에게도 가벼운 웃음과 함께 인사 한번 드리면 그만이다.




오랜만에 뵙는 친척 어른들께 두 딸들을 인사시키고 자리에 앉는 내 모습이 여간 뿌듯하지 않다.

어제까지만 해도 콕콕 찌르던 배가 어느새 나았는지 두 딸들과 피로연 뷔페에서 접시가 쌓이도록 배불리 먹고 시원한 트림을 하며 예식장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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