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겨울에도 커다란 창으로 들어오는 넉넉한 볕 덕분인지, 아니면 작은 잎사귀 하나도 어여삐 여기는 어머니의 마음을 아는 것인지화분들은 사시사철 굵은 잎사귀와 짙은 초록에 흔들림이 없다.
크고 작은 화분들이 주인이 앉혀준 제위치에서 각자의 멋을 흘려내고 있고 커튼봉에 걸려있는 줄기 몇 가닥 있지 않은 화분들마저도 그저 늘어져있는 모양새가 아니었다. 힘이 있었다.
"아효, 요 꽃 좀 봐라, 여간 신통하지가 않네, 해마다 꽃이 한 번만 폈는데 올해는 어째 또 꽃을 피웠을꼬, 너무 이쁘네, 어서 와서 이 꽃 좀 봐라"
화분 앞으로 가보니 어머니의 모아진 두 손 사이에서 진분홍 꽃 한 송이가 도도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예쁘네요"
화분 앞에 쪼그려 앉아계시는 어머니의 등 뒤에 우두커니 서서 마지못해 거드는 듯 한마디를 해드렸다. 그 순간 나에게는 그저 가만히 이쁨 받으며 피어나는 꽃 한 송이 보다 그런 꽃 하나도 기특해 마지않는 어머니의 마음이 더 크게 보였다.
길을 가다가도 어머니 눈에는 걸음걸음 기특한 것들이 어찌 그리도 많은지, 풀사이 피어난 작은 꽃 하나에도 감탄을 쏟아내시며 눈에 띌 것 없는 작은 생명 한 조각 앞에서도 한참을 머물러주시곤 했다.
작은 껍질 안에서 부둥켜안고 있던 여린 생명들이 때를 찾아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기까지가 얼마나 고된 삶이었을까를 짐작하고도 남을 어른의 마음이어서 일까.
요즘에는 글을 읽다가도 나이 지긋하신 어른들의 글을 보게 되면 글 안에서 풍겨지는 넉넉한 품에 잠시 바쁜 숨을 고를 수 있는 여유가 느껴져서 좋다.
지긋함이 풍겨오는 글을 읽을 때면 글을 쓰신 분의 발자국을 따라 나도몇 발작 앞서 세상을 둘러 불 수 있는 특권을 받은 것 마냥 여유로운 착각이 들기도 한다.
일렁이는 물가 앞에서 꼿꼿하게 고개 세우지 않고, 애써 빠지지 않으려고 휘청거리기보다는 이미 건너본 강이니 그 깊이를 헤아려 두 다리 걷어붙이고 조용히 발을 내어주는 넉넉함이 느껴져서 좋다.
작은 바람에도 요란하게 흔들리지 않고 지나가는 사소함에 성내지 않고 진짜 지켜야 할 것에는 고개를 숙일 줄 아는 그런 노련함.
정작 본인들의 굽이굽이 인생은 살아보니 별것 없다고 말하는 어른들의 잔뼈 굵은 속내가 그렇게 깊어 보일 수가 없다.
평소 겨울에도 잠을 잘 때면 이불밖으로 시원하게 발을 내밀고 자는 습관이 있는 나는 첫 아이를 낳고도 답답한 것이 싫어 찬 기운이 올라오는 거실바닥을 맨발로 돌아다녔다. 친정엄마의 노릇까지 해주셔야 했던 어머니는 기꺼이 내 몸조리를 해주신 것도 모자라 나를 쫓아다니시며 두툼한 수면양말을 신겨주시곤 했다.
잠 많은 내가 아이의 울음소리에도 일어나지 못하는 밤이면 어머니는 조용히 먼저 일어나셔서 젖병을 들고 아이를 품에 안으셨다. 그리곤 어느새 양말을 밀어낸 내 발에 조용히 또 한 번 양말을 신겨주셨다. 아기를 안고 살포시 몸을 흔들어주며 우유를 먹이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누워서 보고 있으니 너울너울 물 따라 흘러가는 고운 꽃잎처럼 편안하고 따뜻했다.
어머니는 8년째 일어나지 못하는 남편을 직접 씻기고 닦이며 긴 시간 돌보면서도 이 세상 지긋지긋하다 함부로 뱉지 않으셨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두 아들을 주고 가서 그저 고맙고 그리운 사람이라는 어머니의 말씀. 결코 이 세상을 함부로 살아갈 수 없게 만드는 묵직한 소리가 되어 나에게 돌아왔다.
아버님의 첫제사가 있던 날, 어머니는 큰 아들이 따라주는 술을 술잔에 받아 제사상에 올리고 두 손을 곱게 포개올리며 아버님께 절을 했다. 남편의 제사상 앞에 절을 하며 눈물을 흘리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한동안 눈에 잊히지가 않았다.
결혼 전 사는 게 너무 고달프고 힘이 들때면 대답해 줄 이 없는 '엄마'라는 이름을 허공에 불러보곤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내게도 기꺼이 그 이름의 주인이 되어 주신 분. 거친 세월에 더 곱게 물들어가시는 우리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