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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ringsnow Nov 01. 2023

아빠의 가을노래

그리고 답가




가을 여정


낙엽이 한잎 두잎 지는

오솔길 걷다 보니

떡갈나무 바람결에

숨죽인 울음소리

걸음을 멈추고 벤치에 앉았네


지는 잎새를 보며

지난날을 회상해 보니

푸르던 시절 환희와 열정 그리고 회한

눈물 나는 대목도 있었지

하지만 그러한 순간들이

삶의 의욕이 충만하더라


되돌아보니

작고 작은 인연이 인생의

행로를 만들고

되돌아갈 수 없는

먼 한순간이 되어있네

가을에는 허무가 찾아오나 보다


바람에 흰머리 날리며

주름진 얼굴

붉은 노을빛을 물들인 쓸쓸함

하지만 가슴 한편에 흐르는

지지 않는 열정으로

이 순간의 가을을 사랑하리라


                         아빠의 시 하나.




언제부턴가 이따금씩 핸드폰으로 아빠가 시를 보내온다.

처음 읽을 때는 그저 흘러가는 글자들로 보고 넘겼다가 어느 순간 문득문득 핸드폰을 펼치고 다시 한 번씩 읽어보게 된다.

그러면서 글 안에서 아빠를 찾아가고 있는 내가 보였다.

아빠는 소리를 잘 듣지 못하신다. 예전에 누군가에게 들었던 말로는 귀에 큰 충격을 받아 고막을 다쳐 청력이 많이 손실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오랜만에 아빠를 만나 대화를 할 때도 다정하고 조용한 목소리가 아닌 쩌렁쩌렁한 큰 소리로 대화를 해야 해서 누가 보면 싸우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오해를 살만한 풍경이 그려지곤 한다.

그리고 몇 년 전 결핵을 앓고 나서부터는 시력도 상실이 되어 책을 읽거나 핸드폰을 보시는 것도 어렵다고 했다. 그렇게 주변의 이런저런 소리와 시선에 멀어진 아빠가 서늘한 가을바람에 마음을 부여잡고 한 자 한 자 시를 써 내려가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오타도 보이고 맞춤법이 틀린 글자도 있지만 글 안에 아빠가 새겨 넣고 싶었던 글자들은 충분히 알 수 있다.




가을


형재봉 산마루가

아스라한 구름사이로 묻힐 때면

눈썹달이 파리한 얼굴을 내민다


초가집 흙담 어디선가

밤새워 울어줄 귀뚜라미는

애를 녹이고

또랑가 버들나무 그림자가

가을바람에 흐느적거릴 때면

내 어린 가슴에 서늘한 한기와

외로움


어둠이 짓누른 산골밭이랑 검은 달빛 아래

허수아비 하나가 빈 들녘을

한아름의 고독으로 지키고 서있다


한잎 두잎 물들어가는

단풍나무 아래 앉아

그대를 그립니다.

하늘 덥던 녹색구름이 꼬리를 감추면

길 위에 뒹구는 낙엽

나는 그대를 기다립니다.


뭉근한 가을바람 불어오면

창 문에 턱 괴고 물끄러미 바라보던

떨어지는 나무 잎새

하나 둘 셋 그리고

보고픈 그대여!


                                        아빠의 시 둘.




                   

젊은 시절 철없는 나이에 결혼을 하고, 이혼을 하고 사람보다 술을 더 의지하며 살았던 아빠가

가슴속에 품고 살았던 열정은 무엇을 향한 것이었을까.

굽이굽이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갈 수 있다면 아빠의 선택은 지금과 달라질까?

평안하셨으면 한다.

그 길의 끝이 어떤 모습이든.




가을


살랑거리는 바람에

하늘하늘 춤추는 억새 풀숲에

숨바꼭질하는 송장 메뚜기

모두가 가을날의 사랑이어라

연녹빛 가로수 잎을 어루만지는

초가을 햇살처럼

모든 것을 포근하게 사랑하리


가을비 그치고 실안개 사이로

조용히 오르는 아침태양처럼

그렇게 사랑하리

무디었던 가슴을 활짝 열어

토실한 알밤 같던 사랑을

차곡차곡 담아 보리

코스모스 여린 꽃송이를

얄밉게 희롱하는 갈바람까지도

고운 미소 한가득 보내리


가을에는 하늘처럼 바다처럼

모두를 다 안아주고

파랗게 하얗게 사랑하리라.


                              아빠의 시 셋.





그리고 나의 답가.


아버지


한 잎 두 잎 물들어가는

마른나무 아래 서서

저 먼발치를 내려다봅니다.


가시는 길 일렁이는 가슴 부여잡고 갔을

그 길을 바라보며

조용히 눈물로 씻겨드립니다.


당신을 위해 흘렸던 원망의 눈물

함께 하지 못했던 시간의 애통함도

이제는 내려놓습니다.


빈 들녘에 홀로 서서

외로움을 짓이겨야 했던 당신도

뜨거운 젊음 앞에 많은 순간 무릎을 꿇어야 했겠지요


나는 이제 하늘처럼 바다처럼

내 삶을 한껏 안고 살아가려 합니다.

그렇게 서러운 눈물을 흘려야 했던 이가

나 여야만 했다고 내가 돌아온 길이 나에게 말해줍니다.


그렇게 걸어왔던 길을 허리 굽혀

조용히 손으로 다독일 때

바스락거리는 낙엽 따라 따한 온기가

손끝으로 올라옵니다.


부디 이 온기가 멀리서나마  

당신에게도 전해지기를 기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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