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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ringsnow Jan 07. 2024

있어도 없는 곳

하지만 이제 충분합니다.



한참을 잔 것 같다. 눈을 뜨고 시계를 보니 아이들 저녁 챙겨줄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찬바람을 맞으며 아이들과 다녀온 1박 2일의 여행동안 딱딱하게 굳었던 몸과 마음을 따뜻한 이불속에서 녹여내느라 한참이 걸린 듯하다.

언제부턴가 벼르고 벼르던 곳을 다녀왔다. 어린 시절 자랐던 시골마을.

세 살 때부터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곳에서 자란 후 고등학교를 나름 도시로 나오긴 했지만 대학교 때까지 주말이면 찾아갈 수 있는 집, 용돈도 필요했으니 시외버스를 타고 2, 3주에 한 번씩 내려가는 시골집이었다.  

전날 근처 지역에 있는 다른 관광지에서 1박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일찍 채비를 하여 20분 거리에 있는 그곳으로 출발했다. 전날부터 왠지 모를 설렘과 기대감이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 좋음으로 머릿속을 흐르고 있었다.

'어떻게 변했을까?, 나의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 자리에 이제는 누군가의 새로운 보금자리가 되어 있을까? 어떤 사람이 살고 있을까? 잠시 들어가도 되는지 물어보고 집안을 살짝 들여다봐도 될까? 아주 조그마한 흔적이라도 남아있을까? 혹시 아는 누군가와 마주치지는 않을까?..' 

이른 아침부터 서두른 채비에 졸음이 덜 깬 아이들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 차 안에서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잔잔한 기대감으로 시골마을에 들어섰다.




대학교 4학년을 마칠 때쯤 할머니는 하시던 일을 더 이상 잡지 못하실 만큼 건강이 안 좋아지셨다. 병원에 입원해 계시는 동안 병원 창문을 내려다보며 어서 나가서 저기 마당에 있는 무를 뽑아오라고 나를 밀어내거나 나에게 고모 이름을 부르며 밥을 하라는 등 무서운 섬망이 찾아왔다. 이후 할머니 건강은 더욱 쇠약해졌고 퇴원 후 더 이상 혼자 집에 계시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 되어 결국 작은 아빠는 할머니를 요양병원으로 모시게 되었다. 다섯 명의 자식을 둔 할머니는 그중 누구의 곁에서 잠시라도 모셔지는 애틋함은 받지도 못하고 그렇게 힘없이 요양병원에서의 기나긴 삶을 시작하셨다. 할머니가 요양병원에서 계신 세월이 벌써 20년이 다 되어 간다. 그 시점이 나에게는 참으로 다행이고 감사한 일이긴 했다. 전적으로 내 학비를 다 감당해 주셨던 할머니께서 대학교의 마지막 학비가 끝나는 동시에 일을 놓게 되신 것이니 나로서는 할머니에게 물질적으로 받을 만큼 모든 것을 받은 사람으로서 어떤 아쉬운 말도 할 수 없었다. 편찮으신 할머니를 바로 요양병원에 모시는 것에 화가 났지만 이제 막 직장생활을 시작한 내가 할머니를 모시겠다는 말은 엄두도 낼 수 없으니 여전히 나는 이 집안에서 힘도, 존재도 없는 어린 사람이었다.

할머니가 요양병원에 들어가신 후 우리가 살던 시골집을 급히 팔았다는 말은 누군가에게 흘러가는 말로 듣게 되었고, 그 집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15년의 내 추억을 어느 누구도 존중해 주는 이는 없었다. 분명 그 집에는 나의 어린 시절이 담긴 앨범들과 친구들에게 받은 편지들, 내 옷가지들이 있었건만 나에게 내 물건을 챙겨야지 않냐고 말 한마디 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결국 그 집에서 함께 한 나의 오랜 시간들은 그렇게 기척 없이 조용히 사라져 버렸다.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얼마나 변했을까? 집이 있던 자리를 알아볼 수는 있을까?

남편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며 발끝이 자꾸 종종거리며 애가 타올랐다. 어서 보고 싶었다. 나에게는 소중한 내 어린 흔적들이.

다행히 집이 있던 자리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자리만 찾았을 뿐 그곳에는 앞집과 뒷집이 있던 모든 자리를 밀고 단단한 벽돌의 행정복지센터가 자리 잡고 있었다. 허탈함이 느껴졌다. 근처의 다른 곳은 그 자리 그대로 폐허가 되어 있기도 하고, 낡았지만 푸근한 형체로 그 자리를 지키며 살아가고 계시는 어르신들도 보였건만 내가 살던 집은 커다랗고 딱딱한 건물 하나가 통으로 삼켜버린 채, 늘 뛰어다녔던 골목길마저 흔적도 남겨주지 않고 시골마을의 행정기관 건물이 되어 있었다. 어린 시절 수십 번을 드나들었던 초록색 대문도, 한쪽 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던 장독대도, 계절마다 밥상을 채워주었던 집 앞 텃밭도 모두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라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아주 작은 흔적 하나는, 누군가 살고 있는 집의 온기로는 이어지고 있겠지'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는데. 딱딱한 관공서 건물을 올려다보고 있는 내 마음을 시린 겨울바람이 훑고 지나가는 듯했다.

집이 있던 자리에서 출발하여 아이 걸음으로 20분은 족히 걸렸던 초등학교에도 가보았다. 가는 길에 오래된 가게들이 보일 때면 그 자리를 지켜주고 있는 것이 괜스레 고맙기까지 했다. 학교는 똑같은 자리에 있었지만 알록달록 칠해져 있는 건물과 교문의 위치도 달라져 있어 왠지 이곳마저도 내가 다녔던 곳이 아닌 듯 낯설었다. 학교 뒷문에서 5분 거리에 있었던 기차역은 이미 오래전 폐역이 되어 정겨운 입구만 남아있었다.

어린 시절 나를 담아주었던 그 시골마을은 이렇다 할 커다라 변화도, 하지만 그대로 세월을 담고 있다고 말하기에도 애매한 그런 거리가 되어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찾아가 본 나의 어린 흔적은 마치 숭덩숭덩 이가 빠져서 입을 벌릴 때마다 시린 바람을 채 막아주지 못하는 듯한 어설픔과 애매한 허전함만 남긴 채 오랫동안 기다려온 추억여행은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3살의 어린아이가 삼촌의 손을 잡고 가서 무겁게 머물러야 했던 그곳은, 사라지는 그 순간에도 나에게는 어떤 의사도 물어보지 않은 채 흔적도 없이 또 그렇게 다른 시간으로 덮여가고 있었다.

 



1박 2일 집을 비우는 동안 가스비가 무서워 보일러를 끄고 갔더니 집이 얼음장이 되어 있었다. 집안 공기가 데워지는 동안 이불과 담요를 뒤집어쓰고 누워있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굳이 이유를 찾고 싶지 않은 무력감이 몸을 누르는 듯했다. 가까스로 일어나 거실 한쪽에 던져놓았던 짐을 풀어 세탁기에 옷을 쏟아 넣고 뜨거운 물로 한참을 씻고 나와서야 다시 내 일상에 초점이 맞춰졌다.

냉동실에 있던 갈비탕을 뜨겁게 끓여 아이들에게 한 그릇씩 가득 담아주고, 나는 냉장고에 있는 시원한 맥주 한 캔을 꺼내 들었다.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랴. 지금 내 앞에는 이렇게 귀한 아이들이 나를 보며 웃고 있는데. 

맥주 한 모금 시원하게 한 후 언니에게 오늘 다녀온 추억 여행에 대한 메시지와 사진을 보내줬다. 어린 시절 우리가 자랐던 공간이 어떻게 변했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우리 집이 좋은 자리였나 보네" 언니의 단순하고도 깔끔한 대답이 더 이상 내 씁쓸함에 꼬리를 물지 않도록 끝을 내주었다. 

'그런가 보네..'

이제는 나도 그곳을 생각하며 애잔한 그리움은 가지지 않아도 되니 언니의 말마따나 우리가 자란 그곳은 자리가 좋았던 것으로 나도 냉정하게 정리해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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