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컨이 없는 문밖으로 발을 한 발짝만 내밀어도 사람의 기운을 순식간에 빨아들일 듯한 무서운 더위가 연일 이어지고 있다. 거대한 자연의 기세 앞에 한없이 작고 나약한 인간은 결국 시원한 바닥을 찾아 기운 없이 늘어지고 마는 그런 여름을 보내고 있다.
매년 조금씩 더 뜨거워지고 있다는 지구에서 내년의 여름은 또 얼마나 당황스러운 여름이 될까 당장 이번 여름도 물리치지 못한 판에 벌써부터 걱정이 앞선다.
다음 주면 아이들의 여름방학이 끝난다.
아이들 방학 때마다 재택근무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는 회사 덕분에 이번 방학에도 집에서 일을 하며 아이들 끼니와 간식을 챙길 수 있었다. 고마운 일이긴 한데 에어컨을 틀어도 회사 사무실만큼 시원한 공기가 돌지 않는 집에서 두 아이와 무더운 여름의 하루하루를 보내려니 여간 갑갑증이 나는 게 아니다.
방학이 며칠 남지 않았으니 휴가를 내고 물놀이를 떠났다.
이번 목적지는 물놀이를 하고 싶어 하는 아이들의 마음과 조용한 곳에서 한적하게 쉬고 싶은 나의 목적을 동시에 충족할 수 있는 곳으로 선별했다. 안에 수영장이 있는 한옥집 펜션. 물론 호텔에서 보내는 소위 말하는 호캉스도 단어만으로 행복한 미소가 지어지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자연과 좀 더 가까운 풍경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남아있으니 다행이기도 싶다.
차를 타고 좁은 시골길을 한참 달려가니 그 마을의 끝자락을 지키고 있는, 우리가 예약한 펜션이 나왔다.
남편과 아이들은 도착하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시원한 물로 뛰어들고 나는 수영장 옆에 있는 평상에 누워 정말 오랜만에 하늘을 보고 한참을 누워있었다. 평상에 누워있어도 여전히 후끈한 공기가 머릿속에 땀방울을 맺히게 했지만 그래도 잠시나마 어떤 쫓김도 없이 이렇게 시간을 흘려보낼 수 있으니 더운 공기와도 잠시 함께 있을 만한 여유가 생긴다.
아이들은 아빠와 함께 한참을 물속에서 뛰어놀더니 입술이 퍼레져서 평상으로 올라와 뜨끈한 라면국물을 먹고 또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한옥으로 지어진 펜션은 내가 기대했던 대로 주변은 한적했고, 마당의 둘레에는 작은 항아리들과 소담스러운 소품들이 놓여 있었다. 세월의 이끼를 입은 집안의 물건들이 지나치게 정갈하지도, 그렇다고 이 한옥집의 풍경을 해칠 만큼 함부로 놓이지도 않은 적당함들로 각자의 자리를 채워주고 있었다.
내가 부릴 수 있는 시간의 여유 안에서 아이들도 잠시 함께 멈출 수 있게 만들어줄 수 있다는 것이 휴가의 가장 큰 매력이고 목적인 듯하다. 고학년으로 들어선 첫째에게 방학하기 한 달 전부터 학원의 안식일이라는 이름으로 거의 두 달 동안 모든 학원을 쉬게 해 줬다. 학원을 모두 쉬어도 생각보다 시간적인 여유가 많이 생기지 않는 것도 아이러니했지만 어차피 해야 할 것들이 이미 정확하게 정해져 있는 우리나라의 학생인 내 아이들에게 엄마로서 해줄 수 있는 것은 아직은 선택의 옵션이 될 수 있는 학원으로 바쁜 걸음을 내몰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에서다.
요즘 엄마들 사이에서는 내년부터 AI교과서가 시범적으로 들어선다는 말에의견들이 분분하고 특히나 반대인 입장에서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나 역시도 아이들이 넘겨야 할 것은 작은 화면 안에서 이루어지는 터치의 간결함이 아닌 거칠기도 하고 매끈하기도 한 종이책이라는 의견은 확고하다. 이미 AI가 사람의 많은 영역을 넘어서고, 그래서 학교에서도 AI를 도입함으로써 각각의 아이들을 위한 개별적 맞춤 교육을 제공한다는 참으로 멋진 이유를 내세우고 있지만 아직 직접 보고 만지고 느껴야 할 것들이 세상에 가득 남아있는 아이들에게 디지털 세상은 너무나 깔끔하고 간결하고 제한적이다. 저마다의 아이들이 다양한 과정을 거쳐 자신을 알아가도록 그 주체성은 주인인 아이들이 가지고 마음껏 휘둘렀으면 좋겠는데 AI가 아이들마다의 부족함을 파악해서 각 단계를 알아서 준비해 준다고 하니 주객이 전도될까 벌써부터 걱정이 올라온다.
자신에 대해 스스로 찾아 헤매면서무한한 꿈을 그려볼 수 있는 바깥세상으로 많이 꺼내줬으면 하는 바람인데 현실은 계속 '발전, 진보'라는 단어와 함께 아이들을 디지털 세상 안으로 시선을 멈추게 하는 것 같아 그저 안타까운 엄마의 마음이다.
한옥집을 둘러보고 있자니 이 집이 풍겨주는 멋스러움은 기와를 얹고 앉아있는 집의 몸체만이 아니었다. 마당 한편에 놓여있는 작은 돌멩이들, 화려하진 않지만 계절은 잊지 않도록 때마다 피어주는 제철 풀들과 꽃들, 바깥과 안을 적당히 경계 지어주는 토담. 이 모든 것들이 함께 어우러져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따뜻한 풍경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우리 아이들도 그렇게 살아갔으면 좋겠다.
모두가 주인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어느 하나 함부로의 존재도 없이 모두가 필요한 존재로 그렇게 어울리며 살아갔으면 좋겠다.
시골집은 풍경도 좋고 느리게 가는 시간도 좋은데 딱 한 가지, 정신없이 달려드는 벌레는 사랑하기가 참 어렵다. 놀러 가는 재미의 으뜸은 밖에서 구워 먹는 고기의 맛이라며 초저녁부터 설레어하는 남편을 차마 무시할 수가 없어서 마당으로 나가긴 했지만 귓가에서 윙윙거리는 벌레들 때문에 한 팔로는 벌레를 쫓느라 계속 휘젓고 한 손으로는 남편이 구워놓은 고기를 입속으로 부지런히 넣느라 혼이 빠질 듯한 저녁시간이었다. 멀리서 보면 네 식구의 그림자가 마치 달빛 아래 기와집 처마에서 팔을 한들거리며 함께 춤을 추는 모양이 아니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