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그램으로 만들어진 초록의 숲 안에 NC센터가 있고 그 안에는 새로운 가족이 되어줄 부모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살고 있다. 일 년에 두 번 단체 여행을 가는 것 외에는 외부로부터 철저하게 아이들을 보호하는 곳. 이곳을 찾는 이들이 입양을 원한다고 해서 쉽게 아이를 데려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깐깐한 서류 심사와 건강검진, 심리검사를 시작으로 가디언들의 세심한 고민 끝에 매칭된 아이와 몇 단계의 면접 과정을 거친 후 함께 생활해 보는 합숙의 단계까지 만족스럽게 마쳤을 때 비로소 가족이라는 새로운 묶음으로 이곳을 나갈 수 있게 된다. 입양이 되어 이곳을 나가는 아이는 NC센터 출신이라는 모든 흔적을 지우고 깨끗한 출발이 되는 것이다.
며칠 전 선물 받은 "페인트"라는 책의 내용이다.
현재와 같은 저출산의 시대가 앞으로도 지속되고 더 심각해진다면 '정말 이 책에서와 같은 세상이 올 수 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낳긴 했지만 키울 수 없는 이들을 위해 국가에서 아이를 책임지고 키워주는 NC센터. 아이가 없는 부부의 삶을 살다가 자녀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순간이 오면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센터를 찾아와 서로에게 맞춤인 가족을 찾는 것. 그래도 국가의 존속이라는 목적과 가족이라는 형태를 지키고자 하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그렇다 해도 이런 상황까지 생각해봐야 하는 우리의 현실이 씁쓸한 건 어쩔 수가 없다.
이미 여러 차례의 페인트(NC센터 아이들이 parent's interview를 지칭하는 은어)를 거친 아이들은 이곳을 찾는 어른들의 모습에서 아이에 대한 진정한 바람이 아닌 아이 덕분에 정부 지원금을 받고 연금까지 안정적으로 받기 위한 목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물론 좋은 부모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룬 아이들도 있었지만 열세 살부터 열아홉 살의 라스트 센터 아이들은 이곳에서 입양이 되지 못하면 평생 NC센터 출신이라는 기록을 가지고 홀로 이 센터를 나가 독립을 해야 한다.
이 책에서는 '페인트'라는 말의 의미를 '자신의 삶을 전혀 다른 색으로 물들여 줄 누군가를 찾는 과정'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입양을 하기 위해 사람들이 NC센터를 찾아와 준다면 다행이지만 만일 부모가 될 만한 사람들이 찾아와 주지 않는다면 이곳에 있는 아이들은 말 그대로 그 누군가를 계속 기다려야 하는 수동적인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페인트라는 과정을 통해 '부모를 고를 선택권'이 마치 아이들에게 있는 듯하면서도 결국은 나를 위한 누군가가 와주지 않으면 선택이라는 단어에 닿기까지도 어려운 일이었다.
소속감.
'내가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안정감'. 이것을 가짐으로써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일을 겪을 때마다 흔들리기는 해도 꺾이지는 않으면서 살아나갈 수가 있다.
NC센터에 있는 아이들도 누군가의 자녀로, 가족으로 살아가길 원한다. '가족'이라는 것은 결코 완전함과 완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없지만, 각자가 새롭게 부모를 선택하고 아이를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갑의 위치에 놓이게 되니 최대한 자신에게 맞는 대상을 고르기 위해 까다로운 시선으로 상대를 바라본다. 태어날 때부터 이미 정해진 부모와 평생을 살아가게 된다 할지라도 그 가족이 각각의 모두에게 이상적일 수는 없는데 종종 우리는 '가족'이라는 이름 앞에 한없이 까다로워지기도, 한없이 절절해지기도 한다. 가족 안에서도 서로를 향한 잣대를 다르게 대고 있으니 내 가족에 대해 만족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힘들고 외로울 때 그 힘듦을 이겨낼 수 있는 근거가 되어 준다면 가족으로서의 의미는 이미 충분한 것이 아닐까 싶으면서도 가족이 나를 좀 더 빛나게 하는 바탕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부정할 수가 없다.
시선.
나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과 자신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일치시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책에서도 입양이 되어 NC센터 출신이라는 흔적을 없애는 것이 이곳 아이들에게는 앞으로의 인생을 살아가는데 너무나 중요한 일이었다.
"사회는 원산지 표시가 분명한 것을 좋아하잖아요"
이 책의 주인공인 제누301을 통해 작가가 던지는 일침의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는 이들에게 작가가 진심으로 하고 싶은 말은, 부디 내가 지나온 과거의 시간과 어쩔 수 없었던 원인에 묶여있지 말고 주체적으로 내일을 선택하고 꿈꾸며 나아가기를 바란다는 응원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출발은 어쩔 수 없었지만 앞으로 펼쳐질 선택의 몫은 온전히 내가 가질 수 있으니 좀 더 당당하고 담대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스스로를 사랑하는 재능을 마음껏 키워내라고.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부모는 불안한 존재들이다. 어쩌면 아이들보다도 더 불완전한 존재들이다. 어른이라고 폼 내며 살고 있는데 이미 굳어버린 모습을 바꾸기에는 어지간한 용기와 노력이 없이는 되지도 않는다. 그래서 나를 닮은 아이들을 키우며 부모도 자신의 나약한 어린 자아를 소리 없이 계속 키워내고 있을 뿐이라는 미안한 고백도 해본다. "우리"는 결국 끊임없이 "나"를 찾아가면서 가족으로부터, 부족하고 나약하기만 했던 어린 나로부터 홀가분한 독립을 꿈꾸는 크고 작은 사람들일 뿐이다.
그러니 이 책의 주인공이 자신을 믿고 용기 있게 선택한 것처럼 세상을 향해 조금만 더 힘을 내어주기를 진심으로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