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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리카 Erika May 25. 2024

파프리카와 아루굴라

햇살 아래 할 일이 있다는 위안


근래에는 소위 '멘탈이 바사삭' 하고 부서지는 개인적인 몇 가지 일들을 겪었다. 사실 여전히 겪어내는 중이긴 하지만, 최악은 지나갔기를 바라며 살아냈다,라고 과거형으로 쓰고 싶다. 마음에 여유가 없으니 실수가 생기고 그 실수는 또 다른 부주의를 부르는 연쇄 반응이 일어난 결과였다. 스트레스로 소화가 되지 않아 며칠을 게워내고, 체력이 약해져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부쩍 힘들어졌다.


몸과 마음이 박살 난 내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은 얼마 전 친한 언니네 집에서 받아온 씨앗들이었다. 언니는 '너네 집 발코니 크잖아, 좀 심어봐'하며 집 뒷마당에서 키운 작물들에게서 나온 파프리카와 아루굴라 씨앗을 잘 말려두었다가 내게 챙겨준 것이다. 사실 나는 파프리카를 썩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그걸 넙죽 받아오고는 집안 어딘가에 처박아 두었다. 그러다 너덜거리는 나와는 다르게 날씨는 비현실적으로 좋던 어느 날, 발코니에 작렬하는 햇살을 바라보다 문득 그것들이 생각났다. 날씨가 좋을 때 얼른 심어야 하는데...


곧장 근처 가게에서 낑낑거리며 흙을 한 포대 사 왔다. 크기도 모양도 제각각인 화분에다 새 흙을 퍼담고 얻어온 파프리카와 아루굴라 씨앗을 심었다. 하는 김에 원래 키우던 바나나 줄기랑 올리브도 분갈이를 해 주었다. 허접한 화단이 내 눈에는 꽤 그럴듯해서, 뿌듯함과 기대감에 들뜨기 시작했다. 발코니에 텃밭을 크게 만들어 여러 작물을 왕창 심고 싶다는 욕심도 마구 샘솟는다. 그래봐야 별 일 한 것도 없는데 햇볕 아래 발코니에서 움직인 것도 운동이라고 땀이 났다. 기분이 상쾌했다. 요즘은 밥을 먹는 동안에도, 샤워를 하는 순간에도 온갖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는데, 흙을 만지고 화분을 다듬는 동안은 정말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이 얼마 만에 느껴보는 '무념무상'의 순간인지.


그 날 이후 이후 나는 뺀질나게 발코니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별 할 일도 없으면서 바깥을 들어왔다 나갔다 하기를 반복하고 있다. 겨우내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누군가에게서 얻어왔던 값싼 의자와 야외 테이블도 두길 잘했다 싶다. 화분을 만지다 의자에 앉아 바람을 맞고 햇살을 구경한다. 얼음을 동동 띄운 아이스커피도 괜히 발코니에서 마시면 더 풍미가 진했다.


실내로 들어오면 다시 머릿속은 복잡해지고 현실에 닥친 문제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햇살 아래 할 일이 있다'는 같잖은 사실 따위가 이상하게 위안이 되었다.


얼마 후 씨앗을 심은 화분에는 초록잎이 자라났다. 이게 파프리카 화분이었나 아루굴라였나. 아 모르겠고, 하여간 기분이 째진다. 아무것도 할 힘이 나지 않던 나는 갑자기 방치해 둔 여분의 작은 책상을 옮겨다 집 안 구석에다 work station 을 만들어 앉았다. 다시, 그래도 또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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