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맹증?
야맹증인가. 평소 어두울 때 잘 보이지 않는다. 야맹증은 비타민 A부족인데. 당근을 요새 먹지 않아서 그런가? 생각했다. 똑같이 당근을 먹지 않는 남편은 어두워도 잘 보이는 거 보면 당근과 야맹증의 상관관계는 잘 모르겠다.
얼마 전 서초에 갈 일이 있어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오후 5시 넘어서 집에 오는데 하루종일 비가 와서 우중충했다. 어두운데 거리에 차는 많고 복잡하고. 그런데 문제는 가로등의 부재였다. 보통 길거리의 가로등은 타이머로 불이 켜진다. 수동으로 일일이 켤 수가 없으니 타이머를 맞춰놓는데 오후 6시 정도로 맞춰놓은 듯하다. 5시여도 거리가 깜깜한데 가로등 불빛도 없이 복잡한 강남 거리를 빠져나오는데 진이 빠졌다. 그때도 내 야맹증을 탓하며 밤에도 잘 보이는 사람이 부러워졌다.
언젠가부터 자동차 계기판이 잘 보이지 않는다. 선명하게 보이던 계기판이 흐릿하게 보였다. 요즘 날씨가 계속 흐린데 계기판까지 잘 보이지 않으니 답답했다. 시속 몇 킬로 인지 기름은 얼마나 있는지 체크하기 힘드니. 눈도 좋은 편이 아니다. 20대 초반에 라섹한 눈인데 지금은 한쪽 눈 시력이 많이 떨어졌다. 다행히 안경 쓸 정도까진 아니어서 버티고 있다. 남편에게 자동차 계기판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얘기했다. 그랬더니 하는 말.
남편 : "당근 좀 챙겨 먹어~ "
결국 당근 밖에 답이 없는 건가.
가족들과 오랜만에 애슐리 퀸즈에 갔다. 뷔페는 각자 기호가 다른 네 명이 모두 만족할 수 있어 좋다. 자기가 원하는 음식을 잔뜩 담아 자리로 왔는데 남편과 아들 접시에 당근이 보인다. 파마산 치즈를 얹은 '그릴드 당근'이다.
우리 집 남자 셋 다 당근 요리를 보니 내 생각이 났나 보다. 사실 내 접시에도 있었다. 그렇게 평소보다 몇 배는 많이 당근을 우적우적 씹어 먹으면서 생각했다.
'이제 계기판이 좀 보이려나?'
다음 날 아이 축구를 데려다주는데 계기판이 또 잘 안 보인다. 아이에게 하소연을 하게 된다.
나 : "엄마 큰일이다. 계기판이 점점 안 보여."
아들 : "엄마 나도 안 보이는데? "
나 : "그렇지? 엄마만 그런 게 아니지?"
순간 아들도 당근섭취가 부족한 건 아닌가 싶다가 남편을 부른다. 남편도 계기판을 보더니 이상하다며 서비스센터에 문의해 보라고 한다. 그러면서 화면조작을 해본다. 화면 밝기를 조정해 보려고 애쓰면서. 검은 바탕에 하얀 글씨가 아닌 하얀 바탕에 검은 글씨로 바꿔 보기도 하고. 그래도 계기판이 환해지지 않는다. 불길한 예감이 들면서 얼른 계기판 흐린 이유 찾아보라고 했다.
남편 : "이거 배터리 나간 거 같아. 지금부터 절대 시동 끄지 말고 한 시간 멀리 돌고 있어 봐. 내가 고칠만한데 알아볼게. 절대 시동 끄면 안 돼. "
나 : "기름도 없는데. "
남편 : "기름도 시동 끄지 말고 넣어~"
그렇게 주행이 시작되었다. 시동을 끄면 안 되는 미션이 주어지니 왜 이렇게 시동이 끄고 싶은지. 일단 여기저기 동네를 돌아다녔다. 세탁소에 들러 세탁물도 찾고. 주유소에 들러 기름도 넣고. 도서관에 들러 화장실도 들르고. 시동은 절대 끄지 않았다. 배도 고프고 부비동염에 몸도 힘든데 드라이브 아닌 드라이브가 계속되었다. 토요일이라 정비소를 찾기 더 어려운 모양이었다. 마침내 남편은 고치는 장소를 문자로 보내왔다.
서울 동대문구 000. 집에서 40분 거리였다. 가는 길에 전화를 했다. 사장님은 아주 친절하게 응대해 주셨다. 배터리도 기존 자동차 서비스센터의 가격보다 1/3 정도 저렴한 금액을 얘기하셨다. 전화 속 남자분이 너무 친절하셔서 젊은 남자분일 줄 알았는데 나이가 많으신 중년의 아저씨였다. 이 분야에 20년 경력인 베테랑이신 듯했다. 아저씨는 자부심이 있었고 정직해 보이셨다.
그렇게 고치는데 고치는 과정이 신기해서 한참 쳐다보았다. 각종 공구들이 보이고 자동차 배터리도 처음 보고.
그렇게 계기판이 어두워진 영문도 모르고 야맹증 타령만 하다 배터리를 교환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모르면 몸이 고생한다.'는 말을 뼈저리게 느낀 날. 운전을 지속할 건데 자동차에 대해 이렇게 문외한 사람이 되면 안 되겠지. 어쨌거나 당근은 평소에 챙겨 먹어야겠다. 이런 오해가 또 있으면 안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