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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굵고크면볼드인가 Apr 11. 2023

같은 디자이너

인가요?

× 앞의 몇 개 글에서 이미 밝혔듯이 나는 현재 작은 기업 안에 소속된 브랜드 디자이너이다. 현재 직장과 바로 전 직장을 제외하고는 성격이야 이모저모 다르지만 퉁쳐서 디자인 에이전시에 다녔고 기업의 외주, 기업의 외주의 외주 일들을 했다. 인하우스 디자이너가 처지가 낫고 혹은 낮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난 실제로 세상에 몇 명이나 해봤을까 싶은 재미있고 나름 규모가 큰 일들은 다 퉁쳐서 에이전시에 있을 때 해봤고 지금은 그냥 적당히 일하고 싶어 기업에 있는 거다.




지금 하고 있는 일 중 하나 외부 에이전시에 큰 디자인 프로젝트를 맡기고 나는 중간에서 커뮤니케이션하는 거다. 디자인 관리라고 하지 않고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다고 굳이 말한 이유는 내부에서 하는 결정에 내 발언권이 거의 없고 경영들이 정한 내용을 디자인 언어로 풀어 전달하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일을 하는 중 어떤 때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경영진의 입을 빌려 한두 개씩 숨겨두기도 하지만 큰 틀은 경영진이 원하는 대로 전달한다.


이 일은 잘 진행되고 있지 않았다. 디자이너인 내 눈에도, 디자인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경영진의 눈에도 그 업체에서 해온 디자인과 일하는 방식에 노오오오오력이라던가 고심한 흔적들이 잘 보이지 않았고  내부에서 준 피드백이 잘 반영되지 않거나 딱 거기까지만 반영되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들이 하는 방식으로 보여주면 디자인을 모르는 사람은 이걸 디자인 진행과 전개로 이해하지 않을 것이며 일에 진전이 없을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프레젠테이션 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이야기 했으나 결국 가져온 것은 이전과 같았고 그걸 그대로 참고 진행하기에 내가 다니는 회사의 대표는 많은 돈을 이미 지출했다고 생각했다.


외부 업체와 일하는 어려움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고 디자이너인 내가 다른 디자이너를 대하는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물론 내가 퉁쳐서 에이전시였던 곳들에 다녔을 때 나는 그렇게 일하도록 디렉팅 받지 않았고 또 그렇게 일하지 않았지만 노오오오오오오력이 보이지 않는, 30분핀터레스트를 하면 가져온 시안의 대부분을 찾을 수 있는 디자인을 마주하며 처음에는 어쨌든 "같은" 디자이너 입장으로 나는 그들을 마냥 쉽게 경영진 편에서 공격하거나 비난하기 쉽지 않았다. 그냥 그 디자인 자체의 어려움이 느껴졌다. 그 에이전시 소속 디자이너가 아니라 과거 퉁쳐서 에이전시였던 곳에 다던 나에 대한 연민이었다.


디자인이란 그런 거라고, 디자인 전공이 아닌 사람 눈에 보기에도 고심이 보이지 않는 디자인을 보며, "보라, 여기와 저기가 다르지 않는가, 눈에 잘 보이지 않아도 디자인 디-테일이란 이렇게 어려운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 그 외부 디자인 업체의 대표가 나에게 이러저러한 점을 내 회사 대표에게 잘 좀 설명해 달라고 했다. 나를 "같은" 디자이너라고 생각한 거다. 아니, 몇십 년을 그 바닥에서 구른 짬으로 아마도 내가 나 스스로 그들에게 "같은" 디자이너로 이입하고 있는 것을 뻔히 예측하고 그런 얘기를 한 거였을 거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디자인의 디자도 모르는 대표의 의견을 그저 전달하는, "우리 대표님"이라는 방패 뒤에서 당신들의 디자인에 한숨을 쉬고 한심해하는 "다른" 디자이너가 되어갔다.


나를 "같은" 디자이너로 매수했다는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자기들을 위해 방패막이가 되어달라는 부탁을 듣고 있자면 '아... 저도 퉁쳐서 에이전시에서 구를 만큼 구른 놈입니다' 소리가 절로 나온다.


미팅을 가는 내게 회사 사람들은 갑질을 하고 오라고 한다. 이러면 돈을 못준다고 하라고 한다. 나는 내가 내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고 욱하고 "다른" 디자이너인걸 티 낼까 봐 가슴을 부여잡고 미팅에 간다. 나는 철저하게 나는 아무런 힘이 없고 이 모든 건 "우리 대표님"이 원하는 거라고, 디자인을 잘 모르는 입장을 설득시키려면 이 정도의 노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력을 해달라고 읍소하는 척한다.


"같은" 디자이너로 입장을 헤아려달라는 말을 듣기에는 나는 너무나도 지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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