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든 Nov 17. 2022

열 번도 더 고맙습니다

백운역 쌍굴다리

만보 걷기를 시작했다. 백운역 창휘마을을 걸었다. 여기저기 소규모 재개발이 이루어지고 있어서 어수선했다. 

 적벽돌 굴뚝이 솟아있는 한경 목욕탕과 그 옆 2층짜리 연립주택에 공사 가림막이 둘러쳐져 있었다. 철거 중이었다. 지금 내 나이쯤이었을 시어머니와 이십 대 중반이었던 나와 아직 유치원에 가지 않은 딸이 다니던 목욕탕이었고 우리 집보다 훨씬 좋아 보이던 연립주택이었다. 모형을 만들어 보관하고 싶은 풍경이었다. 

 퇴근길 정체가 심해지자 마을 안길로 차들이 몰려왔다. 보행이 불편했다. 거기다 배달 오토바이가 불쑥불쑥 튀어나와 위험하기까지 했다. 안전하게 걸어 다닐 수 있는 마을 길도 만들지 못하면서 아동이나 노인 친화도시라고 자랑하는 말들이 허무맹랑했다. 


 앞뒤에서 오는 차들, 골목에서 튀어나오는 오토바이, 길 가에 주차한 차들을 피해 걷다가 산책코스를 부평공원으로 바꿨다. 어두워지고 있어서 공원 한 바퀴만 돌고 돌아가려고 했다. 그때 길 한 중간에 떨어진 뭔가가 보였다. 안경에 김이 서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모자나 장갑 같은 방한용품 같았다. 


 저벅저벅 빠른 걸음으로 얼마간 가다가 등 굽은 할머니를 만났다. 허리가 60도쯤 굽었고 보행기를 끌고 있었다. 보행기로 공병이나 캔을 모으는 것 같았다. 할머니는 종종걸음으로 걷다가 차들을 피해 멈춰 섰다가 또 나아가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보행기를 돌려 왔던 방향으로 다시 가기 시작했다. 머리에 하얀 손수건이 덮여 있었다. 지나오면서 본 게 모자 같았다. 


 “할머니 모자 흘리셨어요?” 

할머니가 그렇다고 했다. 모자를 주워오겠으니 가만히 계시라고 하고 모자가 떨어진 곳으로 갔다. 그사이 모자가 없어졌으면 어쩌나, 모자 하나 값도 할머니에게는 큰돈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걸음이 빨라졌다. 모자는 그 자리에 있었다. 길 한 중간에 떨어져 있어서 바퀴에 깔리지도 않았다. 모자를 돌려드리고 조심히 가시라고 당부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열 번도 더 고맙습니다.”


 할머니의 인사는 내 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깟 친절이 열 번도 더 고마울 일인가? 할머니는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 걸까?  할머니에게 다시 갔다. 

 “할머니 어디 사세요? 제가 모셔다 드릴게요. 같이 가요.”

 할머니는 어서 가던 길 가라며 손사래를 쳤다. 음색은 부드러웠지만 신세 지지 않겠다는 완강함이 있었다. 멀찍이서 할머니를 따라가기로 했다. 백운역 쌍굴다리 아래서 할머니의 보행기가 비틀거렸다. 할머니를 쫓아갔다. 

 “할머니, 저기 공원 근처 사지죠? 저도 거기 살아요. 같이 가요”

 할머니는 어디 산다고 대답하지 않았다. 노인에게 사기 치는 사람들이 많으니 어디 산다고 선뜻 말할 리 없었다. 공원 근처 감나무집 아시냐고, 내가 그 집 며느리라고 말하자 할머니는 마지못해 희망촌에 산다고 대답했다. 희망촌을 가려면 급경사인 언덕을 올라간 다음에 왕복 6차선 도로를 건너야 했다. 도저히 할머니 혼자 가게 둘 수 없었다. 그랬지만 할머니는 기어코 혼자 갔다. 


 할머니가 눈치 채지 못하게 뒤따라갔다. 언덕을 오르고 찻길 건너는 것만 보고 돌아갈 작정이었다. 할머니는 마을 길을 잘 알고 있었다. 차량 교행이 뜸한 곳에 이르자 보행기를 세워두고 한참을 쉬었다. 나는 귤 파는 트럭 뒤에 숨어 할머니를 지켜봤다. 다시 걸음을 뗀 할머니가 공원 근처 편의점 앞에서 멈췄다. 거기 들어가서 공병을 팔았다. 


 언덕길이 보였다. 할머니가 언덕을 오르기 시작하면 달려가서 부축해드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할머니가 나타나지 않았다. 편의점 안에도 할머니가 없었다. 급경사인 언덕 대신 빙돌아가는 평지로 간 것 같았다.   


 집에 돌아와 방바닥이 뜨끈 거릴 정도로 보일러를 틀었다. 그래도 한기가 가시지 않고 팔이 얼얼했다. 팔꿈치와 무릎 주변이 절여서 파스를 뿌렸다. 시원하게 풀리라고 서늘할 만큼 뿌렸다. 절이는 증세는 사라졌는데 홧홧함이 몰려왔다. 


 할머니를 쫓아갈 때는 몰랐는데 한파주의보가 내려져있었다. 할머니는 잘 주무실까? 열 번도 더 고맙다고 인사하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걱정하지는 않았을 텐데. 곧 대통령 선거일이다. 파지나 공병 줍는 노인들을 찾아가는 후보가 있다면, 운전자나 보행자 모두 안전하게 다닐 수 있는 골목길을 만드는 후보가 있다면 매일 유세장에 나가 춤추는 짓이라고 기꺼이 하겠다.      

작가의 이전글 글자 먹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