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이 냉기로 써늘하다. 시아버님이 주무시고 계시다. 전기장판의 온도를 올린다. 살그머니 문을 닫고 나온다. 귀가 맞지 않는 방문이 삐그덕 소리를 낸다. 연탄난로를 살핀다. 아직 밑불이 이글거리고 있다. 들통에 물을 가득 담아 난로 위에 올린다. 그제야 인기척을 느끼셨는지 기력 없는 목소리로 시아버님이 묻는다.
“어떻게 왔냐?. 애들은 어쩌고 왔냐?”
시어머님이 집안 행사에 가면서 시아버님을 챙겨보라고 하셨다. 점심을 차려드리고 가야 할 텐데 점심때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있다. 뭘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공연히 집 여기저기를 기웃거린다.
스물네 살의 내가 여기 왔을 때 이 집은 서른이 안된 청년이었다. 새 식구를 들인다고 입식 구조로 집을 수리하고 도배를 하던 날 이 집을 방문했다. 시아버님은 풀을 칠하고 시동생들은 머리 위로 길 다란 도배지를 들어 천정을 메워갔다.
“형수님 쓰실 방 깨끗하게 도배해드리겠습니다”
작은 시동생이 서글서글하게 말했다.
“예? 아! 예. 예쁘게 해 주세요.”
시부모님과 함께 사는 것은 나의 의견이 무시된 결정이었다. 장남인 남편은 부모님을 모셔야 한다는 책임감이 컸다. 일 년만 같이 살자고 했지만 나는 일 년으로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내 뜻을 묵살하는 남자와는 같이 살 수 없다고 이별통보를 했다. 그런 중요한 결정에 내 의견이 무시된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둘 만의 공간에서 신혼살림을 차리게 될 줄 알았다가 별안간 시집살이를 해야 한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결국 남편 뜻대로 됐다.
시아버님이 서재로 쓰고 있는 방을 들여다본다. 내가 살았던 신혼방이다. 이곳에는 두 평 남짓한 골방이 달려 있다. 골방은 창고였다. 출입문을 벽지를 발라 막아놓아서 창고가 있는 줄 몰랐었다. 결혼 후 몇 개월이 지났을 때 집 뒤꼍에서 이 창고의 다른 문을 발견했다.
방벽을 더듬어 문틀을 찾아냈고 문틀을 따라 벽지를 뜯어냈다. 작은 나무문이 나타났다. 아랫부분은 합판이고 위쪽 1/3에 유리가 끼워진 어렸을 적에 많이 본 문짝이었다. 유물 복원 작업하듯 물을 뿌려가며 벽지를 떼어냈다. 벽지는 켜켜이 덧발라져 있었다. 벽지가 벗겨질수록 옛날에 살았던 집들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도배지도 유행이 있으니 어릴 적 내가 살았던 집 벽지와 똑같은 것을 여기에 발랐을 수도 있었다. 벽지가 똑같은 집이라니! 흥분되었다. 벽지와 가족들의 연관성을 생각했다. 사방으로 연속된 작약 무늬 벽지는 남편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해에 발랐고 그 위에 붙은 다이아몬드 무늬 벽지는 제대한 해, 그리고 그 위 벽지는 첫 직장에 취직한 해에 발랐을 수 있었다.
벽지 조각들을 들고 시어머니에게 갔다. 그것들을 언제 발랐는지 물었다. 시어머니는 싱겁게 쳐다볼 뿐 기억해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40년 전에 이 집이 지어졌고 나도 여기에 둥지를 틀었다. 남의 집에 뿌리를 내려야 하는 타성받이의 서러움도 겪었다. 집안 어른들이 엄해서 일찌감치 ‘여보’, ‘당신’이라는 호칭을 쓰고 남편에게 존대어를 써야 했다. 갖은 심부름을 다 시키는 남편이 얄미워도 어른들 앞에서는 심부름을 들어주었다. 가부장적인 가풍에 억울함을 느끼면서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이삼 년 주기로 한 도배를 네다섯 차례나 했다. 장마가 지면 벽지에 곰팡이가 피어서 도배를 자주 해야 했다. 그렇게 도배지를 바르는 사이 시동생 둘이 결혼을 했고 두 딸, 세 조카가 태어났다.
부평동 767번지 47, 이 집은 시집살이의 부자유와 가족들 간의 갈등과 딸을 키우며 성숙해진 내 삶의 애환이 있는 곳이다. 또한 시아버님의 칠십 년 인생역정이 있는 곳이다. 이 집이 재개발의 물살에도 끄떡하지 않고 살아남아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