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교육원칙
“ 알아봤어? ”
“ 아니, 아직."
“ 너 그러다 후회한다. 나중에 아이한테 원망 들어. 가르치는 것도 다 때가 있는 거야. 오늘은 꼭 알아보고 상담 예약해.”
오늘도 열심인 친한 동네 언니의 독촉 전화(?)다. 더 늦기 전에 빨리 영유로 갈아타라고 성화다. 자기도 뒤늦게 영유를 알아보고 막상 보내보니 보내지 않은 첫째와 둘째가 너무 실력 차이가 난단다. 그러니 너도 후회하지 말고 얼른 보내라는 말씀.
내가 뭉그적(?) 거리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일단 영유가 우리 형편상 여의치가 않고, 과연 그 비용을 들이면서까지 지금 이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우선순위인가라는 확신이 들지 않아서다.
흘려듣고 무시하기에는 언니의 말이 계속 맘에 걸린다. 흔들리는 내 마음의 여지를 틈타 언니는 계속 압박(?)하고 있다. 처음에는 자기 생활도 바쁜 언니가 우리 아이 교육에 이토록 열심히 관심을 가져주고 조언을 해 주는 것이 고마웠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 정도와 강도가 지나치고 내 의견을 존중하지 않거나 선택의 여지를 내게 주지 않고 답을 내려줄 때 혼란스러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언젠가부터는 계속되는 언니의 조언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결국 내 아이의 교육은 내가 결정하는 것인데 왜 자꾸 내게 강요하는 것일까.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언니의 확신 어린 말투
이면에는 자신도 모르는 불안감이 있는 건 아닐까.
본인이 선택한 이 방법이 맞고 다른 사람들도 함께해서 그 확신을 보태주길 바라는 마음. 얼마나 많은 시간, 에너지, 돈을 들여서 이 선택을 했는데. 반드시이 길이 옳아야 하고 맞아야 한다는 마음. 혹시 본인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도 다른 방법이 있다는 걸 받아들일 여유도 없는 마음. 불안하지만 들키면 안 되는 그런 마음.
평소에 나를 잘 따르던 교회 동생을 모처럼 만났다. 우리 아이와 동갑인데도 벌써 영어가 제법 익숙하다. 영어를 잘하는 동생이 계속 영어 동화책을 매일 읽어주니 아이가 아직은 어려도 영어 발음도 좋고 거부감도 덜하다. 영유를 다니지 않아도 웬만한 수준의 영어에 대한 감도 있고 영어책을 거부감없이 읽는 모습이 대단해 보였다. 그저 아이를 칭찬해 주고 동생에게 잘한다고 수고했다고 말했으면 됐다. 한글도 영어 못지않게 신경 써서 잘 챙겨주라고 그 정도까지만.
그런데 그 집에서 필요 이상 흥분하면서 어렸을 때는 영어보다 모국어인 한글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아냐며 일장 연설(?)을 하는 나를 발견했다. 마치 그 동생이 한글을 소홀히 해서 아이의 모국어 언어능력에 지대한 손실을 끼치기나 한 것처럼. 착한 동생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었고 나는 간신히 마음을 진정하면서 앞으로 잘하는 말투의 분위기로 연설을 마무리 지었다. 얼굴이 화끈거린 것은 그때부터였다.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내가 언제부터 그 동생의 아이에 대해 그렇게 대단한 관심과 열정을 보였다고. 내가 다른 사람의 삶을 걱정해주는 그다지 이타적인 사람도 아니면서.
내가 그토록 부담스러워하던 동네 언니가 했던 실수를 나 역시 다른 사람에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그 집 아이를 다 아는 것처럼 답을 정해주고 그대로 하라고 가르치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한참을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부러웠구나.
어찌 보면 자연스럽지만 인정하거나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 질투심. 영어에 익숙하고 잘하는 동생의 아이가 내심 부러웠나 보다. 솔직한 마음을 객관적으로 알아차리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다른 엄마의 조언에는 물론 귀담아들을 내용이 분명 있다. 다만 조심스러운 부분은 그들이 내 아이를(혹은 내가 다른 집 아이를) 엄마보다 정확하게 알지 못할뿐더러, 때로는 본인조차 모르는 서툰 감정이나 마음들이 함께 섞이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나처럼 질투가 섞일 수도 있고, 상대적으로 내 아이가 처진 것 같은 조급한 마음이나 불안감이 들어갈 수도 있다. 혹은 전문가가 아니라서 실제로 잘 모르지만 애정과 열정을 가지고 잘못된 방향으로 열심을 내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 모두 완벽하지 않기에 시행착오를 거칠 수 있는 것이다. 엄마는 중심을 가지고 무엇이 내 아이에게 필요한 조언이고 어느 것은 흘려들어도 되는지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잘 알지 못하는 다른 사람이 우리 아이의 교육에 대해 성급한 판단과 처방을 내리지 않도록 주도권을 내어주어서는 안 된다.
자녀교육에 있어서 유일하게 변치 않는 원칙이 있다면 자녀교육에는 정해진 정답이 없다는 점이다. 우리 아이와 남의 아이는 성격, 흥미, 재능, 가치, 가정환경 등 모든 것이 다르지 않은가. 옆 집 아이에게 효과적이었던 교육 방법이 내 아이에게 똑같이 통하지 않는다. 참고만 할 수 있을 뿐.
내 아이의 교육 문제 앞에서 만큼은 엄마의 마음은 갈대처럼 흔들린다. 좋다는 책, 교구, 학원을 알아보고 일단 돈을 들이면 조금은 안심이 된다. 아이의 교육을 위해 무언가는 했다는 안도감과 함께. 그러나 이 사이클은 또 다른 영역에서 반복된다. 때로는 그 불안감에 형편 이상으로 많은 돈을 들인다. 무언가를 하고 있지만 이 방향이 맞는지에 대한 확신도 없다.
옆집 엄마의 극성(?)과 업체들의 마케팅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교육에 대한 큰 그림과 원칙이 엄마의 마음속에 있어야 한다. 아이를 어떻게 키우고 싶은지에 대한 타협하지 않는 원칙 말이다.
처음부터 생기기는 어렵다. 내 경우에는 존경할 만한 주위의 육아 선배들의 조언을 구하기도 하고, 관련된 많은 책도 두루 읽어보고 필요하다면 전문가의강의나 영상을 통해 깨닫는 과정이 큰 도움이 됐다.
계속 내 안에 고민들에 대한 답을 찾아가다 보면 무엇이 옳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에 대한 대략적으로나마 감이 잡힌다. 이 과정은 한 번에 그치지 않으며, 지속적인 수고가 필요한 부분이다. 엄마의 마음에 주관을 가지려는 여러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는 뜻이다.
엄마가 중심을 잡고 가야 남이 하는 대로 하지 않을수 있는 용기도 믿음도 생기게 된다. 설령, 잠시 흔들린다 해도 다시 중심을 잡을 수 있다. 혹시 또 옆집 엄마가 나를 또 흔들면, 또는 내가 흔들리면 명심하자. 모두에게 통하는 만능 정답은 없다. 지금은 불완전해 보여도 내 아이에게 맞는 최선의 답을 찾아가고 있을 뿐. 그 답은 엄마인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