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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탈리 Dec 31. 2023

빵이의 독백

'개리야스'를 입은 빵이

섣달 그믐날이다. 어제, 엄마와 언니의 동작은 심히 수상했다. 춥지도 않은데 BYC내의를 내게 입힐 때부터 알아봐야 했다. 산책가겠거니 했는데, 바로 전 휴대폰으로 새어 나오던 예림이(나의 라이벌, 지금은 조금 친해짐)의 목소리가 왠지 마음에 걸리는 게 아무래도 기분이 찜찜했다. 할머니, 어쩌고 저쩌고 하며 엄마에게 애교 폭탄을 날리던 예림. 한 애교하는 나로서도 감당하기 힘든 애교의 고수인 예림. 엄마는 슬며시 내 눈치를 살피며 내게 빨간 내의를 입혔고, 퇴근한 언니도 어느 틈에 내 간식과 소변패드 등, 소지품을 챙기는 것이었다.


"빵아, 성원언니네 가서 하룻밤만 자고 놀아, 응? 엄마랑 언니랑 내일 데리러 갈게?"

'그러면 그렇지. 내 이럴 줄 알았지. 매번 예림이한테 세뇌당해서 나만 쏙 빼놓고 갔다 오더니.....  그래도 혼자 집 지키는 것보담 나으니 그대들의 외출을 용인해 드리겠어요!'


사실 나도 혼자 있기가 너무 싫은데, 아 그런데, 나 같은 귀요미한테 커다란 집을 떠맡겨 놓고 쉬는 날이면 하루고 이틀이고 독수공방을 하게 만드는 엄마와 언니! 미워할 거야. 물론 나도 엄마와 언니를 무척 사랑한다. 그러기에 두 집사가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얌전히 집을 봐준다. 숙식제공, 무보수의 한 조건으로. 나 같은 든든한 파수병이 있기에 집사들은 안심하고 일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맡은 바 중대한 임무를 충실히 해내는 내게, 고구마와 개껌으로 환심을 사려 애쓰는 집사들이 가상하여, 있는 애교 없는 애교 다 부려가며 장단을 맞춰 준다. 계단을 올라오는 집사들의 발걸음 소리를 포착하는 순간, 환영모드로 바뀐 나, 빵이는 전속력으로 달려 나가 요란한 환영무의 격랑 속으로 몸을 던진다. 왜냐, 집사들이 좋아해 주니까. 좋아해 주는 집사들이 좋으니까.


나, 빵이는 이 원칙을 집사들의 손님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한다. 열렬한 환대에 송구스러워 어쩔 줄 몰라하는 손님들. 가끔 임무에 열중하다 보면 손님의 품에 안겨 소변을 찔끔거리는 실수를 범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귀여우니 봐주겠지, 뭐. 알코올에 흠뻑 빠진 사람들이 가끔 나보다 더한 실수를 한다고 들은 터에 이쯤이야...... 손님들이 한참 앉았다가 일어서면 환송모드 발동, 가지 마, 더 있다 가, 를 외친다.


"왜 이러는 거래요?"

"가지 말라고 짖는 거예요."

"정말요?"

반신반의하는 사람들. '나의 선의를 의심하면 섭섭하죠. 그러지 마요. 좀 믿고 살자고요.'


어떤 손님들은 나를 사람이 아닌가고 의심까지 한다. 사람도 아닌데 어떻게 사람처럼 그런 생각을 다 하냐고. 사람이 건 강아지 건 그것이 그리 중요한가? 소통을 할 수 있으면 그만이지. 말이 나와서 말인데, 사람만 생각하는 갈대인 줄 아는가? 우리 견공들도 생각이라는 걸 한다고. 우리 견공들도 실존, 미래를 고민한다고. 나의 눈빛에 녹아드는 집사들과 소통하는 게 좋다. 내 눈을 바라봐요, 집사! 레이저를 쏘아대면 그들은 나의 눈빛을 살피고 시중에 최선을 다하려 애를 쓴다. 잘 길들인 집사 하나 열 자식 안 부러운 이유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충성스러운 집사들의 외출을 허락해 주었고, 어제부터 오늘 섣달 그믐날을 집사의 친척집에서 보내는 중이다. 몇 번 방문한 적도 있고 묵은 적도 있어서 그리 낯설지는 않다. 이 나의 귀여움에 복속된 지 오래인 구역이다. 나 홀로 집에 있는 것보다 나으니 집사들의 배려에 일단 감사해야겠지.


'그대의 무릎에 내 귀여운 몸이 머무는 영예를 주고 싶은데?'

호소하는 눈빛을 쏴 보내면, 임시집사는 용케도 알고 나를 원하는 장소로 모신다. 맨바닥에는 절대 앉지 않는 것이 내 신조임을 익히 아는 집사의 친척들. 최애는 집사의 무릎 위. 그다음은 푹신한 침대 위. 당연히 마룻바닥에 깔아놓은 애착 담요보다 언니의 침대가 좋다. 언니도 그걸 알고 보드라운 언니의 침대 한 켠을 내주었다. 언니의 숨소리를 들으며 깊이 잠들었던가 보다.


"빵이가 코를 골며 자더라니까. 전에는 머리맡에서 자더니 이번엔

무릎 위에서 자는 거야. 뒤척거리지도 못하고 다리가 저려 혼났어."

"그래? 빵이 어르신, 피곤하셨에요?"


아침나절, 임시 집사들이 나누던 대화였다. 사실, 잠자리가 바뀌면 숙면이 힘든 법인데 어제는 어찌 된 일인지, 숙면에 코골이까지 해버렸다. 그렇다고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물으면 뻘쭘하잖아요, 임시집사님! 그나저나 집사들은 나 안 보고 싶은가? 여기 언니한테 빵이 뭐 하냐고 톡만 날리고 말이야. 얼른 데리러 와야 할 거 아니냐고.


언니도 외출하고 나랑 임시집사랑 둘만 있는 지금. 집사의 무릎에 엎드려 있지만, 현관에 무슨 기척이라도 있는지 신경이 온통 그쪽으로만 쏠린다. 집사들이 보고 싶어. 너무 고요하잖아, 한 해가 저물어가는 마지막 날인데. 집사들, 얼른 오시오들. 얼른 와서 나를 데려가, 함께 제야의 종소리를 들읍시다.


집사들이 안 온다. 어제 말로 내일 온댔는데. 그렇다면 내일인 오늘 데리러 와야 하는데......  올해도 세 시간이 채 남지 않았는데......

나, 빵이는  생각하는 갈대답게 곰곰 생각해 본다. 집사들은 분명 하룻밤만 자고 올 요량으로 예림이네 집에  갔다. 내게도 그리 약속을 했고. 그렇지만 산다는 것이 어디 계획대로만 흘러가던가. 손녀의 애교와 어리광에 손녀바보 조카바보인 집사들이 안 넘어가고 배길 수가 있을까. 더더구나 예림의 귀여움, 사랑스러움은 강철도 녹일 만큼 치명적임에.


집사와의 재회는 내년으로 기약하고 임시집사들과 제야의 종소리를 듣기로 하자. 생각하는 갈대답게. 기품 있는 숙녀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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