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충격에도 바짝 쪼그라들기만 했다. 그런데, 그런 조막만 한 심장으로 무대에 서라니.
것도 사백 오십 명이 넘는 관객 앞에서.
소풍 당일도 날씨가 궂기만을, 소풍 가서는 도시락만 까먹고 소풍이 일찍 파하기만을,
무대에 등장하는 순간까지도 예기치 않은 사건을 고대하던 조막 심장의 여자애.
비닐포대 의상과 검은 장화를 신고 날라리 신데렐라와 의붓언니들과 무대에 등장하는 순간,
정신은 천 리 벼랑에 선 듯 아득하기만 한데 사방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무대는 겹겹 관객들로 좁혀지고, 선 채로 앉은 채로 구경하는 관객들은 모두가
함박웃음을 장착한 채, 왕자와 날라리 신데렐라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떨고 있는 왕자(의상 멋지지 않나요?)
반짝거리는 관객들의 시선에 압도되어 가사를 잠시 까먹었던가.
날라리 신데렐라의 눈짓과 힌트에 힘입어 당시 핫한 유행어 - 잘 모르겠는데요(개그맨 심형래 님의 유행어)를 그럴싸하게(어눌함이 포인트) 뱉어내던 기억...... 다시금 왁자한 웃음의 해일이 다녀가고, 등 떠밀려 무대에 섰던 톰은 얼떨결에 왕자로 거듭났다. 그야말로 얼떨결에.
한동안 친구들 사이에서는 장기자랑 뒷얘기가 분분했으며, 수업에 들어오신 여러 선생님들도
왕자의 파격 의상과 날라리 신데렐라의 열연에 대해 논하실 정도로 연극은 성공적이었다.
그 후로친구 S에게는 미스 추, 소녀에게는 왕자라는 별명이 따라붙었다. 톰 못지않은 매력적인 별명이.
연극으로 인해 우리 반이 상을 탔던가는 생각이 나질 않는다. 다만, 며칠 뒤 받아 본 팬레터인지 러브레터인지 모를 어마무시한 편지만은 잊을 수가 없다. '왕자 보시오.'로 시작된 하오체의 편지는 자못 정중하고 진지한 태도로 왕자에 대한 호감과 계속 친하고 싶다는 희망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사절 도화지 두어 장에 장황하게 적은 미사여구의 항연이라니! 소름 돋음(오글거림)과 웃음을
동시에 주는 편지를, 읽는 데만도 한참이 걸렸다. 다윗의 시편과 견줄 만큼 찬미의 언어들로 가득하던 그 편지를.
어찌 혼자 볼 수 있겠는가. 왕자는 심장은 조막만 해도 그렇게 이기적이지는 않았다. 즐거움은 나누어야 하는 법. 친구들과 선생님과 가족들 모두를 이 만찬에 참여시키는 것은 왕자의 의무인 것. 모두가 즐거워했고 웃고 또 웃었으며, 향연 주최자나 다름없는 U의 문장력을 다들 칭찬했다.
그 후로도 문제의 러브레터는 여학생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회자가 되었다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추억이었습니다, 그려.
U와의 우정은 지속되진 못했지만 향기로운 추억만은 영원할 듯하다. 그러고 보니 미스 추도 U도 모두 숙으로 끝나는 이름을 가졌다. 그리운 소녀들. 톰 소여, 왕자, 미스 추 그리고 관객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