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슬로우무빙 Jan 29. 2023

쉬는 걸 못하는 여자

쉼의 재발견

갓 구워진 빵냄새가 코끝을 감싼다. 오전 11시. 깜빠뉴가 나오는 시간이다.

빵을 사서 집에 가려고 했는데 아이들이 먹고 가자고 한다.

방금 내린 카페라테는 포근하고 부드럽게 입 안을 감싸 안았다. 그날 카페 안으로 깊숙이 들어온 햇살은 선물이다. 햇빛 샤워를 하다 보니 노곤노곤해졌다.


담백하고 고소한 깜빠뉴


호텔 1층에 있는 카페다.

한 손에 큼지막한 깜빠뉴를 들고 큰 아이는 요즘 푹 빠져있는 수학도둑을 보고, 둘째는 산리오 색칠북을 펴고 예쁘게 색을 입힌다. 이 여유 뭐지? 애들이랑 카페도 많이 갔었지만 느껴보지 못했던 이 낯선 여유.

찐하게 행복하다.







본래 가만히 있는 성격이 못된다. 이것도 병이다. 아무것도 안 하면 뒤쳐지는 느낌이 나를 괴롭힌다. 누구 하나 뭐라 하지 않는데 성격이 지랄 맞아서인지  다이어리에 뭐라도 한 줄 그날의 한일을 써넣어야 뿌듯하다.

그 누구는 이런 날 두고 부지런하다고 이야기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알맹이 쏙 빠진 날들이 허다하다.


병원에서 일하던 시절 초저녁잠을 잤다. 물리치료 일을 하면서 치료뿐만 아니라 몸이 불편하신 환자 이동 돕기, 무거운 핫팩 정리, 베드 정리 등도 해야 했다. 노동의 농도는 꽤나 짙었기에 약속 없이 집에 오는 날은 초저녁잠은 필수다.

 집에 오자마자 저녁을 먹고 알람을 맞춘다. 보통 7시 20분쯤 잠이 들어 8시에 알람을 맞춘다. 알람을 맞춰놓고도 불안해서 엄마에게 반드시 깨워달라고 몇 번이고 강조해서 부탁했다. 혹시라도 9시쯤 일어나는 날에는 화가 났다. 피곤하면 그냥 잘 것이지 도대체 왜 일어나는 거냐고 했지만 난 이후의 시간을 즐겨야 한다.

뜨개질, 도안 따라 그리기, 드라마를 보기, 십자수, 독서, 거기에 오밤중 10분 스트레칭은 빠지면 서운하다.

여하튼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건 집에 바로 오는 날 얘기인 거고, 주 4일 이상 약속이 있어 친구들을 만나거나 이것저것 배우러 다녔다. 예를 들면 스윙댄스?


여행을 갈 때면 1부터 10까지 계획을 치밀하게 짰다. 그 일정대로 소화할 때의 희열이란.

나 같은 사람은 알 거다. 계획된 시간에 그 공간에 도착해서 즐기고, 찾아본 맛 집에서 맛있는 걸 먹었을 때의 기쁨. 그 희열. 그런데! 사실 몸은 피곤했다.

(되게 피곤한 스타일이네?)


<나의 쉼>
친구들을 만나는 것
집에서 이런저런 취미활동을 하는 것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
치밀하게 계획된 여행을 하는 것

비록 피곤할지라도 쉼이라고 말했다.







결혼과 출산을 한 여자들은 안다. 출산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이 얼마나 달라지는지. 나 역시 그랬다.

일단 애들이 어릴 때는 애 보는 게 일이자 취미가 되어야 했다.

여행? 아이들을 위한 볼거리나 체험이 중심이 되었고, 이젠 치밀한 계획 따윈 하지 않는다. 언제(날짜), 어디를 가느냐 정도만 있을 뿐이다. 먹을 곳은 그날 검색해서 정한다. 촌각을 다투는 이동은 없다. 어차피 계획대로 되지 않기에 변하기 시작했다. 마음을 내려놓는데 몇 년은 걸린 것 같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아르바이트도 하고, 자격증도 따고, 제2의 직업이 생기고 많은 변화들이 있었다. 일상에 쉼표가 있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면서도 내 생활은 그저 바빴다. 가끔 숨이 찼다. 좋아하는 친구들을 만나서 맛있는 걸 먹고, 이야기 나누는 것이 좋기도 하지만 힘 빠지기도 했다.

그렇구나.

쉼을 갈구하면서도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이구나. 머릿속은 끝이 보일 듯 말듯한 깊은 숲길을 헤매고 있었다. 날마다



 





1월 어느 날 선유도역 앞 호텔에서 호캉스를 즐겼다.

호텔에서 보기 힘든 요가룸이 있어 살며시 들렀다. 비어있는 시간 누구나 이용할 수 있었기에 낯선 공간, 낯선 공기 속에서 사부작사부작 몸을 움직였다. 숨이 쉬어진다.


사부작사부작 요가


수련을 마치고 남편과 아이들을 만나 밖으로 나갔다. 얼굴에 부딪히는 찬 공기가 날 한번 더 깨웠다.

그리고 갈비를 야무지게 먹었다. 이렇게 맛있을 일인가? 살살 녹는다.

욕조에 뜨끈하게 물을 받고 반신욕을 했다. 맞아. 나 탕 목욕 정말 좋아하지.


노곤노곤 반신욕


아이들은 과자를 먹고 남편과 나는 와인을 한잔씩 마시며 함께 고른 영화를 봤다. 시간이 훌쩍 지났다. 재밌네.


너무 단단하지도 폭신하지 않은 침대에 몸을 뉘이고, 산뜻하고 포근한 이불을 덮었다. 날 안아주는구나. 다른 세상이다. 달콤하게 잠을 잤다. 눈을 감으면 하얀 백지에 까만 단어들이 날 뛰고 불쑥불쑥 끼어들어 어지러웠다면 그날은 깔끔한 검은색이 딱 보였다.


‘생각의 문 닫습니다. 철컥’


아침 일찍 남편은 출근을 했고,  아이들이 일어날 때까지 이불속에 있었다.


예쁜 한 접시의 행복. 맛있어.

1층 카페에 조식을 먹으러 갔다. 이제 뷔페보다는 잘 차려진 음식이 좋다. 한 접시에 건강한 음식이 예쁘게 담겨 나왔다. 눈으로 먹고, 입으로 즐겼다. 야채를 잘 먹지 않는 아이들 덕분에 내가 너무 많이 먹은 게 함정.


체크 아웃 후 조식을 먹은 그곳에 빵을 사러 다시 간 것이다.  

나의 아이들은 책을 보고, 색칠을 한다. 나도 책장을 넘긴다.

고요하고, 고요하다.


카페 <손유>에서 여유.


나의 생각 시간이 잠시 멈추니 평온하구나.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압박이 나를 힘들게 했구나.

지금 마음이 가볍고, 머리가 맑고, 행복하네.

우리 애들은 이 시간을 정말 즐기고 있구나.

이 행복함이 어디서 왔는지 생각해 본다.



침대, 잠
때때로 무계획
무계획 아래 푹 잠
노트북과 잠시 떨어짐
핸드폰을 내려둠
매트 위에 홀로 섬
남편과의 대화
가족과 간식을 먹으며 영화 관람 <아야와 마녀>
편안한 한 끼 식사
빵 먹으며 책 읽는 아이들
재촉하지 않음


쉼.

쉼의 재발견.

정말 잘 쉬었다.


사진출처 : pixabay

매거진의 이전글 박정현 song for me, 이적 쉼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