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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날의마음 Sep 12. 2024

그 꿈을 이루지 못해서 다행이야

그래, 역시 엄마 말이 맞았어 

성악수업 첫날이었다. 문화센터에는 나 같은 중년 학생들이 많았다. 다들 어떤 마음을 품고 이 자리에 왔을까. 

  


6학년 때였다. 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고 있는데 아빠가 장래희망을 물었다. 내가 노래를 하고 싶다고 했더니 아빠가 말했다. 

"너는 몸도 작고 소리도 가늘어서 안 돼!!"

밥맛이 똑 떨어졌다. 어릴 때부터 칭찬만 들었던 것이 있다면 그것은 노래였다. 내게 노래란 배우지 않아도 흥얼거릴 수 있고 잘할 수 있는 것이었다. 가족들은 내가 교회 솔리스트였던 할머니를 닮았다 했다. 살림은 내팽겨치고 교회에 푹 빠졌던 할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엄마도 그 점에 대해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할머니는 처녀시절 선교사를 따라 미국에 성악 공부를 하러 가기로 했다는데 집에서 그 사실을 알고는 억지로 시집을 보내버렸단다. 여성의 인권이 없던 전근대적 시대의 안타까운 희생자였다. 성악가가 아닌데도 대형교회에서 솔리스트를 한 것은 할머니가 거의 유일했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그런데 그런 할머니를 닮았다는 내게 아빠가 그런 말을 하다니. 야단맞은 듯 충격적이었다. 나는 우리 학교에서는 첫 번째 또는 두 번째로 노래 잘하는 아이였고 변성기도 지나기 전이었는데 아빠는 왜 그리 단언했을까. 

(그 시절에는 마리아 칼라스가 아주 유명했고, 아빠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그것만이 최선이라 여겼었다. 내 목소리는 맑고 높은, 리릭이나 콜로라투라 쪽이었으니 그 시대의 대중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먼후일 음악을 들으면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고등학생이 되었고, 음악선생님이 성악레슨을 받으라며 엄마를 학교에 오라고 했다. 아빠의 판단과는 별개로 난 합창반이었고 선생님은 내게 절대음감이 있다 하셨다. 우리 학교는 강남 8 학군. 공부를 열심히 해도 1등급이 될 수는 없었는데, 노래는 아무것도 안 해도 나보다 잘하는 친구가 한 명밖에 없었다. 그 친구는 계속 성악 레슨을 받고 있었으니 나도 레슨을 받는다면 정말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꿈이라면 꿈이었을 테지.  


엄마가 학교에 다녀오더니 힘이 빠진 소리로 말했다. 

"공부 잘하면 되지, 왜 노래를 하니? 레슨비가 너무 비싸.  "          

음악선생님이 엄마에게 내가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대학에 출강하는 실력 있는 선생님이 가까운 데 사니 레슨 받기도 좋을 거라며 적극 추천했단다. 하지만 문제는 고액의 레슨비. 당시 우리 집은 동생 병원비를 대느라 여력이 없었다. 

"비싼 레슨을 받아도 서울대는 예고 출신이 갈 거고 그다음은 연대나 이대인데. 어차피 노래해서 가나 공부해서 가나 그 대학이 그 대학이지 않니? 그렇게 돈 들이지 말고 취직 잘 되는 데로 가는 게 맞지."


엄마는 소프라노 백남옥이나 테너 엄정행이 부르는 한국가곡을 즐겨 들었고, 노래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어서 고된 시집살이를 시킨 시어머니도 노래 하나로 그 이미지를 미화할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돈'이라는 현실 앞에서는 취향이고 동경이고 없었다.  생활력이 강한 엄마는 노래를 배우고 싶어 하는 마음 같은 것은 생각할 수 없었고, 가성비 좋게 대학에 가는 것이 중요했다.  섭섭했지만, 나는 말 잘 듣는 아이였고 집안 형편을 아니 떼쓸 마음도 없었다. 엄마 말대로 공부를 했고 가성비 좋게 한방에 대학에 붙었다. 나는 학력고사 세대. 당시는 과외도 학원도 금지였고, 날마다 도시락 2개씩 싸가지고 야자만 잘해도 대학에 갈 수 있던 신화적인 시대였다.


 '성악을 배웠으면 어땠을까.' 가끔 생각했다. 교회에서 종종 성악과냐는 질문을 받으면 기분이 좋기도, 쓸쓸하기도 했다. 그러다 대학교 4학년 때쯤, 음대 입시비리가 터졌고 엄마는 다행이라는 듯 말했다. 

"성악했으면 넌 대학도 못 갔을 거야. 저렇게 뒷돈이 큰데 우리 집서 그 돈을 어떻게 다 댔겠어." 

동생도 옆에서 자기가 아파서 내가 덕을 본 것이라고 의기양양해했다. 아쉬움이 없었다고 한다면 거짓이겠지만 현실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었다. 명문대 성악과에 간 합창반 친구들의 입시비리 여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애들이 죄다 부자란 것만은 사실이었다. 



수업이 시작되고, 성악 선생님이 발성법을 말했다.  소리를 둥글게 눈사람처럼 내라거나, 가슴만 열지 말고 배도 이용하라거나, 윗머리를 열어라, 뒷머리를 울려라 등등 열심히 설명을 하셨는데, 그 열성에 비해 전달력은 엄청 떨어졌다. 나는 선생님과 경험치가 다른 세계의 사람이고, 그런 추상적이고 동화적인 설명을 현실에 적용할 수는 없었다. 차라리 설명 말고 노래를 부를 것이지. 내게 말로 하는 발성법이란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 같은 생소한 것이었다. 


"성악과 갔으면 정말 고생했겠다. 휴, 이건 즐겁자고 부르는 노래가 아니잖아?"


몇십 년 만에 노래를 해서인지, 아니면 한국 가곡이란 원래 그런 것인지 노래가 고됐다. 고딩 때였다면 시키는 대로 계속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능력도 없었다. 나이 들수록 음역대가 낮아진다고 하더니만, 나 역시 고딩 때 '쓱' 올라가던 음들도 이제는 '찍' 미끄러졌다. 모든 고음에 대해 수련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다. 


얼굴에만 주름이 생긴 것이 아니었다. 호흡도 짧아졌고 얼마 소리를 내지도 않았는데 소리가 자꾸만 갈라졌다. 노래가 이렇게 어려운 것이었다니! 성악을 못 배워서 진짜 다행이다 싶은 생각이 절로 들었다. 대학시절, 큰맘 먹고 산 음악이론 책을 보다가 앞부분에서 덮어버린 과거도 떠올랐다. 그것은 '수학의 정석'보다 더 재미없고 어려웠고 특히 화성법은 전혀 알아먹지 못했다. 음대 친구는 말하길 전공 필수라 했으니 어찌어찌해서 성악과에 들어갔어도 나는 그 관문을 통과하지 못해 고졸에 머물 수도 있었을 테지. 


수업에서 부른 가곡 '진달래꽃'은 내게는 영영 노답이었다. 선율이 아름다웠지만 옥타브 Ab까지 올라가는 고음이란  직접 불러보니 기교 과시용인 것만 같았다. 그 짧은 곡에 저음, 급격한 고음, 꾸밈음을 다 구겨 넣었으니 일반인이라면 분명 소리가 뒤집어지거나 아예 소리 자체가 나올 수 없는 높은 음역이었다. 감상만 하라는 것일까. 특별한 소수층만 부르라는 것일까. 우리나라 가곡이란 서양에서 갑작스레 들어온 것으로 그 역사도 짧고 향유층도 얄팍한데, 이렇게 고난도의 기술을 요구한다면 계속 명맥을 이어갈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만약 내가 기술을 연마해 노래를 아주 잘하게 된다 해도 이런 효용에 대한 의문은 끊이지 않았을 것이었다.   


역시나 성악 같은 예술은 재력도 재력이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이런 현실적 질문도 덮어버릴 수 있는 사람이 해야 하는 것 같았다. 나처럼 돈과 기술은 부족하고 생각과 의문이 많은 사람에게는 안 어울리는 세계였다. 연신 고음에서 삑사리를 내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오가면서, 마음 한 구석에서 응어리진 뭔가가 녹아내리는 듯했다. 귀와 목은 스트레스를 받았겠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꿈을 가져라.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라. 꿈을 향해 도전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어릴 때부터 이런 말들을 많이도 들었다. 그럴 때면 나도 꿈이 있었는데, 하면서 아쉬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돌이켜보니 엄마의 판단은 옳았고, 현실을 아는 엄마는 현명했다.  어릴 적 나는 멋지게 노래하는 법을 배우고 싶어했지만 그 길이란 결코 평탄치 않았을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 나는 그것을 배우지 않았어도 잘 살아왔고, 그것이 아니라도 이 세상에는 아름답고 좋은 것이 얼마든지 있음을 안다. 그리고 원래 꿈이란 자면서 꾸는 것이 아닌가. 꿈도 아쉬움도 모두 지나간 것.  갈 수 없었던 길,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촉촉한 눈빛은 거둬들여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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