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글부글 보글보글’ 찌개도 아닌 내 속이 끓어올랐다. 아무개들이 오늘 엄청난 행복을 누렸기 때문이다. 남이 잘된 것을 보면 정말 잘 됐다고 좋겠다고 쿨하게 반응하던 나였는데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난 이리도 옹졸한 인간이었나.
오후였다. 카페 게시판을 클릭한 순간 나는 숨을 죽여야만 했다. 충격 감동 스토리가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나는 배우K의 인터넷 팬카페 회원이다. 몇 주 전부터 K의 영화 촬영장에 간식차를 보내는 이벤트를 벌인다고 북적이더니 드디어 결실을 맺었나보다 했는데, 놀랍게도 K가 그 현장에 나타났다는 게 아닌가. 예전에도 이벤트가 있었지만 K는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고 아쉬워들 했는데, 오늘은 완전 천지개벽한 것이었다.
‘손바닥만 한 얼굴에 예쁨을 다 모아놓은 듯한 오목조목한 이목구비’라는 실물 찬양을 기본으로, 먼 곳까지 와주셔서 감사하다며 K가 일일이 악수하고 싸인을 해주었다는 인성 찬양까지 감동 넘치는 후기들이 연이어 올라와 있었다. 그 훈훈한 글들을 읽다가 덩달아 나도 훈훈해졌건만, 어느샌가 짜증이 몰려왔다. 그들은 행복한데 도대체 나는?
사실 나는 그 이벤트에 참가할 수 있는 후보였다. 안타깝게도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이유로 재빨리 포기해 버렸지만. 교통사고 이후로 장롱면허 소지자가 된 나는 기동력이 제로다. 영화 촬영장은 어느 산골, 산 넘고 물 건너 그 길을 어찌 갈꼬. 그렇다고 덤프트럭이 지나만 가도 눈을 꼭 감고 덜덜 떠는 내가 운전을 한다? 아무리 K가 보고 싶어도 목숨을 걸 수는 없는 일이다. 게다가 촬영장까지 들고 가야 할 스탭들에게 나눠줄 선물 등 무거운 짐을 생각하면 저질 체력을 자랑하는 나는 빠져주는 게 예의였다. 아! 나의 명석한 합리성과 신속한 결단력이 오늘날 이렇듯 뼈저린 후회로 돌아올 줄은.
‘부러우면 지는 거다!’
마음 깊은 곳에서 소리가 들렸다. 오래전 인기를 끌었던 한 드라마의 대사다. 관심 있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을 본 주인공이 부러운 마음을 품게 되자 자존심 상해서 하던 혼잣말인데 그 마음을 오늘에야 알 것 같았다. 너무 부러워서 그 부러움을 인정하기조차 싫은, 일그러진 자아가 내 속에서 꿈틀거렸다. 부럽다거나 축하한다거나 일언반구도 못 한 채 카페 게시판을 쓱 훑고 노트북을 닫아 버렸다. 안 보는 게 상책이었다. 부러워하기 싫었으니까, 정말로 정말로.
이렇게 반응하는 내 모습은 나도 당황스러웠다. 나는 내가 솔직한 타입인 줄 알았는데 그것은 착각이었던가. 나의 이 요상한 반응을 무마하기 위해 진심으로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을 방법을 궁리해 보기로 했다. 먼저 그 이벤트에서의 만남에 큰 의미를 두지 않기로 했다. 별거 아닌 것을 내가 부러워할 리 없을 테니까. 개인적 관심과 대화가 오가지 않는다면 진정한 만남이라 할 수 없으니 그들의 만남은 무의미하다고 나 자신을 세뇌했다. 하지만 이런 술수가, 통할 리 없었다.
그렇다면 나도 그들처럼 K를 만날 수 있다고 기대해 보기로 했다. 남편 회사를 쑥쑥 키워 K를 광고모델로 기용, 그걸 빌미로 차를 마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 꿈은 0.2초 만에 연기처럼 사라졌다. 남편 말이 생각나서다. “우리 회사는 고정거래처가 있어서 광고 필요 없어.” 아, 망할 기억력! 이 외에도 문제는 또 있었다. 지금의 회사를 광고가 필요할 만큼 크게 키우려면 과로사 남편을 두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과부가 되고 싶지는 않다.
다른 방법을 끌어냈다. 혹시라도 내가 유명작가가 되어 K를 캐스팅한다면? 전업주부로 있다가 갑자기 드라마 공모전에 출품해 잘나가는 작가들도 있지 않은가. 어린 시절엔 곧잘 만화 속 주인공이 되어 요술지팡이를 휘둘러 소원 성취하는 꿈을 꿨지만 이 상상은 0.02초도 내 안에 머물지 못했다. 현실을 살아볼 만큼 살아본 내게 이는 퇴행 또는 과대망상에 불과했으니까.
진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진실이라 믿는 게 중요하다고 누군가는 말했지만 이런 거짓 위장으로 나 자신까지 속여넘길 수는 없었다. 순간 이 상황에 딱 맞는 대사가 떠올랐다. “그냥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 생각한 것이온데...” 드라마 《대장금》 중, 고기 요리에서 왜 홍시 맛이 나냐고 묻는 수라간 상궁들에게 어린 장금이가 했던 말이다. 그녀는 어떤 의심도 술수도 없이 자기가 느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당당하게 말했다.
나는 더 이상 헛된 노력은 하지 않기로 했다. 이번 일은 ‘부러우면 지는 거다’가 아니라 ‘부러워하지 않으면 지는 거다’가 맞았다. 느낀 대로 솔직히 인정하는 것, 가장 자연스럽고 ‘나’다운 방법이었다. ‘그냥 부러워서 부럽다 하는 것이온데...’
하지만 이 ‘부럽다’는 말을 좀 색다르게 해보고 싶었다. 감동 후기에 달린 댓글들은 순순히 축하와 부러움만을 담아 ‘아, 좋겠네요.’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 말을 ‘칫! 좋겠네요.’로 바꿔본다. 어차피 부럽다는 감정을 인정하기로 한 마당에 나의 꼬인 심사도 솔직히 허용해 보자는 것이다. 위장도 은폐도 그리고 미화(美化)도 없다. 속을 숨기고 좋은 말만 하면 마음의 병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언제 또 어떤 상황으로 닥칠지 모르는 이런 종류의 일들, 대응법은 하나다. 역시 자연스러운 게 최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