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쯤 전이었을까. 친구가 전화를 했다. 제정신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엄청 큰 집을 질러버렸다고, 어쩌다 그랬는지 모른다며 한탄을 해댔다. 집값 하락론자에다 은퇴 후엔 시골에 내려가겠다고 말하더니만, 넓은 거실에 화장실이 세 개, 그리고 진짜 나무가 있는 정원이 달린 저택이란다. 집값도 집값이지만 나라면 유지비가 무서워 엄두도 못 냈을 텐데 친구는 확실히 큰손이었다. 축하한다는 내 말에도 ‘집이 넓기만 하지 썰렁해서 혼자 있을 때면 무서워. 잡초는 또 어떡할 거야. 나도 너처럼 작은 거 사고 여행이나 다닐 걸. 관리비도 비싸고 대출은 또 언제 다 갚냐. 평생 노예생활이 시작된 거지, 뭐.’라면서 친구는 후회를 내비쳤다.
나 역시 집 때문에 한참 골머리를 썩던 시간이 있었다. 해외생활을 오래 해서인지 집을 소유하는 데 별 관심이 없던 나를 두고 누군가는 자유로운 영혼 ‘노마드’라 불렀다. 하지만 문정부가 들어서고 집값이 출렁이자 불안해졌고 여기저기 발품을 팔며 집을 보러 다녔다. 그래도, 버블이면 어쩌나 싶어 집을 덜컥 사버릴 수도 없었고, 기껏 큰맘 먹고 결심했으나 계약 당일날 엎어지기도 했는데.
하루는 아침 8시, ‘****아파트 당첨되었습니다.’라는 문자를 받았다. 뭐지? 스팸인가 했는데. 인생사 알 수 없다고 모델하우스를 몇 시간씩 둘러본 곳은 다 떨어지고 ‘이게 되겠어?’하면서 무작정 클릭한 곳이 당첨이 된 것이었다. 그곳은 서울의 끝자락. 해외 말고 한국살이로만 치자면 J동을 나가본 적이 없는데 아무 연고도 없는 그곳에서, 그 작은 그 아파트에서 잘 살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다. 그래도 역세권이고 1인가구가 늘어나는 추세니 경쟁력 있을 것 같았다. 부동산 카페도 들락날락하고 온갖 지혜와 잔머리를 동원해 그 집의 전망을 생각했고, 몇 날 밤 잠을 설치다 결국 계약을 했다. 당시로는 충분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이었다.(한 달 후 내가 세 살고 있던 J동이 급등했으니 진짜 사야 할 것은 동네 부동산 사장이 그렇게도 권했던 J동의 급매물이었지만.ㅠㅠ)
친구의 넓은 집이 부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맘 편한 게 최고지 하면서 집에 관한 일은 잊고 있었는데. 어제였다. 생일 모임 건으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동네는 잘 안 다녀봐서 모르겠고, 집은... 무슨 리조트 같아. 매일 휴양지에 여행 온 기분이라니까. 정원 손질도 하고 꽃도 심었어.”
지난번과 다르게 친구는 새집에 푹 빠졌는지 목소리에 생기가 돌았다. 더 이상 고민은 하지 않는 듯했다. 잘된 일이었다.
하지만 한편, 리조트?! 그 말 한마디에 갑작스레 내 마음이 출렁, 흔들렸다. 가성비를 논하며 합리적이라 여겼던 나의 계산들이 와르르 무너졌다. 서울 한복판의 리조트라니, 지난번에 느꼈던 큰집에 대한 부러움이 셋이라면 이번에는 열이었다. 리조트라면 모든 일상이 휴식이 되지 않을까. 예쁜 정원에서 살랑살랑 바람을 맞으며 차를 마신다면 인생이 온통 햇살에 폭 싸인 느낌일 것 같았다. 그리고 넓어서 썰렁하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물건 둘 데가 없다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철마다 옷을 정리하지 않고 늘어놓아도 되는 집이라니, 얼마나 매력적인가. 물건 하나를 사면 하나를 버려야 하는, 미니멀리스트의 삶을 고수할 수밖에 없는 나의 공간이 지긋지긋해졌다. 미친 척하고 나도 큰 집으로 갈아타 볼까? 비합리적이라며 무시해 오던 욕구가 꿈틀거렸다.
합리는 뭐고 비합리는 무엇인가.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합리적 판단들이 얼마나 나를 만족시켰는지 질문해 보았다. 부정적인 답들이 꽤 돌아왔다. 합리를 따라가는 것이 최선인 줄 알았는데 지내놓고 보니 아니다 싶은 일들은 집뿐만이 아니었다. 어쩌면 내가 생각했던 합리는 개개인의 성향이 반영되지 않은 일반적 상식에 끼워 맞춰진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친구는 충동구매라고 말했지만, 실은 이성과 합리로 억눌러왔던 자신의 본질적인 욕구를 용감히 실행한 것이었고, 나는 그냥 꾹꾹 누르며 참고 있던 것은 아닐까. 매일 리조트에 사는 기분이라면 그래서 만족과 행복이 일상이 된다면 가성비로는 따질 수 없는 최선의 선택이다.
이거 저거 따지지 말고 나도 초장부터 되는 대로 살 것을. 마음이 끌렸지만 현실적인 이유들로 접어버렸던 여러 가지 일들이 휙휙 머릿속을 스쳤다. 갑자기 이성과 합리를 신봉했던 내가 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