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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날의마음 Jun 26. 2024

왜 나는 과거와 현재를 헛갈릴까

당근에서 어떤 원피스를 보았다.

어머나! 이렇게 예쁜 게? 이 비싼 게 이런 가격으로 나왔다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젊은 시절 내가 엄청 좋아하던 브랜드의 원피스였다. 사진상으로 봐도 차르르 떨어지는 선이 고왔고 디자인이 독특했다.


"너무 이뻐서 당근에서 샀는데 저한테는 안 맞아요. 그래도 옷감도 좋고  딸한테라도 입히려고 했는데 애가 싫다네요. 어깨가 너무 파졌다나. 요즘 젊은 애들은 잘만 입던데 우리 애는 그렇게 세련되지 않았나 몰라. 할  수 없이 재당근하는 거예요."


멋진 차림의 오십 대 아주머니가 아쉬워하며 그 원피스의 짧은 이력을 소개했다.


'당근은 물건을 파는 곳이지 사는 곳이 아니야!'  

독하게 결심하며 브랜드 지갑도 마다한 나였으나 결국 그 원피스 앞에서 무너진 것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나가 뜨거운 땡볕 아래에서 이렇게 첫 거래, 정확히 말하자면 첫 구매를 했다. 푹푹 찌는 날 다른 동네까지 원정을 가서 말이다. 옷은 사진처럼 윤기가 흘렀고 손에 살포시 만져지는 실크의 감촉이 좋았다. 가벼운 깃털 같은 게 확실히 다르기는 달랐다.


집에 돌아오는 길. 그 브랜드에 얽힌 일들이 떠올랐다.  이 브랜드는 디자인도 멋졌지만 44 사이즈도 있어서 가끔 세일을 하면 횡재하는 기분이었다.(지금은 상상에서나 가능하다) 수선할 필요 없이 딱 맞게 입을 수 있어서 맞춤 같았다. 여기 옷들을 입고 학교에 가면 다른 동료나 학생이나 다들 무슨 좋은 일이 있냐고  특별한 날이냐고 물었었다. 평범한 날도 보통의 기분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매력이 가득한 옷들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옷을 꺼내 들었다. 자세히 보니 어깨가 파였다기보다는, 뒤쪽 어깨부터 허리 쪽까지 가늘게 양쪽이 파였고 리본으로 여미는 스타일이었다. 노안 탓에 범상치 않은 디자인이 보였던 것이다. 어느새 눈은 이렇게 나빠졌을까.  


뭐 이쯤이야. 그 독특한 옷을 입어보았다. 옷자락이 차르르, 하지는 않았다. 기분 좋게 떨어지는 느낌보다는 그 실루엣이란 '살을 빼세요~~ '라고 호소하는 모양새였다.  55라 했는데 이렇지? 몸이 불었다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정도는 아닐 텐데. 요즘 구입한 55 사이즈와는 좀 다른 듯했다. 다시 한번 사이즈를 확인했지만 숫자상의 착오는 없었다. 요즘 옷과 비교해 보니 같은 55지만 당근에서 산 원피스 쪽이 더 작았다.


결과적으로 모처럼 큰맘 먹고 구입한 당근은 실패였다. 왜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해가지고는.ㅠㅠ  나는 당근에 대해 생각 못한 부분이 꽤 있었던 것 같다.    


당근은 중고시장이다. 당근 옷에 적힌 사연들은 대부분 '너무 이쁜데, 진짜 좋은데'와 함께 '꼭 입으려고 했는데, 보관만 하다가' 이런 말들이 무슨 세트처럼 나와 있었다. 운이 좋다면 트렌드에 맞는 물건을 살 수 있지만 지난 시즌도 아니고 장롱 속에 꼭꼭 묵혀 두었던 것이 나올 확률이 더 높은 것이다. 내가 구입한 옷은 딱 맞는 어깨나 좁은 치마폭을 보니 최소 5년 이상은 돼보였다. 사진만으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유행에 연연하지 않는 편이지만 그래도 요즘에는 다들 박시하게 입으니 이런 스타일은 좀 아니었다. 남의 작은 옷을 빌려 입은 느낌일 테다.


디자인의 영향과 함께 요즘 옷은 과거에 비해 사이즈도 너그러운(?) 것 같. 사회의 요구인지 자신의 욕구인지 여자들은 작은 사이즈에 대한 동경이 있고, 그래서 여성브랜드는 과거보다 더 큰 44와 55를 찍어낸단다. 그러니 요즘 생산된 55가 잘 맞는 나는 옛시대의 옷이라면 66을 사야 하는 것이었다. 왜 그걸 이제야 알았을까.  


이런 사이즈도 사이즈지만 당근 판매자들의 사연에도 좀 더 귀를 기울였어야 했다. '꼭 입으려고 했는데 내놓습니다.'라는 다른 속사정을 감춘 우회적인 표현도 있었지만,  '살이 쪄서 못 입어요!!'라고 많은 이들이 솔직히 자신의 사정을 고백하고 있었다. 어쩌자고 이렇듯 선명한 직설화법을 망각했을까. 이 상황이 그녀들에게만 적용됐을 리는 없고, 특히 여성호르몬이 바닥나는 나 같은 갱년기 여성이라면 피해 갈 수 없는 일이었다. 유행이 바뀌었고 사이즈 표기가 달라졌고 여러 사정을 감안해도, 제일 큰 요인은 바로 이것이었다.


나는 멋진 옷에 홀려 이런저런 현실은 모두 잊은 채 과거로 깊숙이 빠져들었고, 현재의 나 또한 과거의 나 같으리라고 착각한 것이었다. 예쁜 기억과 설레는 마음이 있더라도 현실은 어디까지나 현실. 가련한 그 실루엣을 살려낼 수는 없는 것을. 


누구에게든 빛나는 시절이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 시절을 가슴속에 품고 회상하며 흐뭇해하기도 그리워하기도 한다.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 현재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면, 빛나던 시절이 영원히 지속되는 양 착각하면서 그 속에서 현실을 재단한다면 문제다. 현재의 나를 과대평가하게 되고 결국에는 일을 그르치게 될 테니까. 사소한 예이기는 하지만, 입지도 못할 원피스를 사들인 나도 바로 그런 경우였다. 


좋은 기억은 소중히 묻어두고 현재에는 현재만 바라보자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현재를 살아가자고 생각한다. 그래야 실망할 일도 추락할 일도 자신을 멍청하다고 탓할 일도 없을 테니까.


그래도 그 원피스는 싼 가격에 샀으니 나를 조금만 탓하기로 한다.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사실 이런 사소한 일은 실수도 아니잖아.'^^ 라면서 말이다.  아마도 지금은 제대로 현타를 맞이한 나를 위한 위로의 시간인가 다. 토닥토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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