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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 카포 Jun 12. 2023

정치에 대해 내가 생각한 모든 것들 part 1.

나는 왜 민주당을 지지했나

나는 어릴 때(여기서 어릴 때라 함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를 의미한다. 그 이전 기억은 솔직히 많지 않다.) '역사'라는 큰 관심사가 있었다. 꿈도 가졌었다. 우리나라 고대사를 공부해서 동아시아 3국 간의 역사 분쟁에 기여하는 꿈이 있었다. 지금 막연하게 가지고 있는 꿈보다 훨씬 선명한 꿈이었고, 정말 하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지금은 물론, 현실적인 이유로 할 수도 없을 뿐더러, 확실히 관심을 놓고 살다 보니 분야에 대한 관심도가 조금은 떨어졌다. 그래도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는 역사라는 과목이나 분야에 대한 진지한 지적 호기심이 있었고, 꿈이 유효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보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다 보니 경제학이라는 분야로 오게 되었고, 지금은 로스쿨이나 CPA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역사를 좋아하던 내 모습이 가끔 그립기도 하고, 취미나 교양 정도로만 간직하고 있다. 사실, 대학에 오려고 입시에 대해서 알아볼 때, 내 성적으로 지금 다니고 있는 학교의 사학과를 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잠깐 혹하기도 했다. 심지어 수시로 쓴 6개 대학 중 초반에 3~4개 대학에서 떨어졌을 때, 정시 전형으로 갈 수 있는 대학을 찾아보다가 역시 지금 다니고 있는 대학의 사학과를 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진지하게 진학 고민을 하기도 했었다. 물론, 실제 진학으로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역사를 좋아했다는 것을 강조하려다보니 서론이 다소 길어진 부분이 있는 것 같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보다 정치적인 이야기를 시작해보자면, 역사와 정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단편적인 역사적 사실의 해석을 두고 정치권이 갈등하기도 하고, 고대사 해석 차이로 인한 영토 문제로 인한 외교 분쟁의 해결 방안을 놓고도 갈등이 있기도 하다. 특히, 정치가 직접적으로 개입된 복잡한 근현대사는 가장 뜨거운 갈등의 소재가 된다. 따라서, 역사와 그 서사에 대한 나의 관심은 정치 세력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지금의 정치관이 그때 형성되었다. 그 당시 가장 핵심적인 사건 두 가지가 바로 국정교과서 사태와 위안부 합의였다. 그 당시의 나는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지금보다 훨씬 더 교과서적인(또는 이상주의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다. 그때의 머리로는 도저히 위의 두 가지 사건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사실,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라는 것부터 이해할 수 없었기도 하다) 지금도 같은 생각이긴 하지만, 대부분의 상황에서 선한 목적이 악한 수단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 기준으로 항상 정치적, 사회적 사건들을 보려고 노력한다. 당시에도 같았다. 그래서, '독재를 통해서 경제 발전을 이루었으니 좋은 정부였다', '식민지였지만 발전시켜주었다' 식의 사고방식은 그때도,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같은 생각으로, '일당독재를 통한 공산국가 건설', '과정이 정당하지 못한 개혁' 모두가 잘못되었다는 것 또한 알 수 있다.) 절차에 오류가 있는 성공은, 성공일 수는 있어도 정의로운 성공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역사는 물론, 성공을 담아야 하지만, 정의로운 것이 무엇인지, 옳고 그름을 따질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박근혜 정부의 국정 교과서를 통한 박정희 정부 우상화 작업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현실 사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우리는 교과서에서라도 정의로운 사람이 승리한다라는 단편적인 지식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저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박근혜 정부와 이른바 보수 세력들을 지지할 수 없었다.


정책적인 면을 떠나서, 그들은 그 당시만 해도 과거사에 대해 떳떳하지 못했다. 민주주의 하의 정당이라는 것이 무색할 만큼 과거 권위주의 정부들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여전히 구시대에 머무르는 태도를 보였다. 임을 위한 행진곡 문제, 건국절 문제부터 위안부 문제까지 떳떳하지 못한 그들의 모습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책에서 배운 것과는 너무나 달랐다. 옳고 그름이 존재하지 않는 역사도 물론 존재하지만,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이 분명히 정해진 문제들을 바라보면서 '악에서도 선이 있다' 또는 '선에서도 악이 있다' 식의 태도는 지켜보기 민망할 정도였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모든 구성원이 그러지도 않았고 모든 문제에 대해 그런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지만, 보수 세력은 여전히 반민주화 권위주의적 이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여기서 반민주화 권위주의적 이념이란, 대략 비합리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숙의와 토론이라는 민주주의의 핵심 요소 대신 폭력과 권위를 앞세우는 것을 말한다. (사실, 2020년 황교안 체제의 미래통합당까지 그랬다고 생각하고, 여전히 그때로 돌아갈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독립투쟁의 역사부터 민주화의 역사가 남아있는 근현대사를 고대사 다음으로 가장 인상 깊고 흥미롭게 공부하고 있던 나에게 이런 요소들은 절대 이 정당은 지지하면 안 되겠다라는 생각을 남겼다.


역사적 요소를 떠나서도 보수 세력을 지지할 수 없었던 이유는 존재한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울산시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노동자들의 도시다. 울주군의 석유화학공단, 북구의 현대자동차, 동구의 현대중공업 등의 엄청난 규모의 공장들이 있는 울산시는 대한민국의 산업, 그 중에서도 제조업의 많은 부분을 책임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노동조합인, 그 악명 높은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이 있기도 한 곳이다. 부모님 역시 직업을 이유로 울산에 살게 되셨다. 울산에서 노동자들의 파워는 정말로 강력하다.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민중당 국회의원이 탄생하고 민중당 구청장이 탄생한 곳 역시 울산이다. 물론 PK지역이기 때문에 보수색채 또한 강해서 대부분의 국회의원들이 보수정당에서 나온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노동자들이 있는 도시인 만큼 다른 지역에서는 보거나 듣기 힘든 일들도 많다. 특히, 정말 수많은 사고들이 발생한다. 외국인 노동자들, 하청업체 노동자들에게 집중되는 이 사고들은 정말 빈번하게 발생한다. 다만, 이런 일들을 사람들이 잘 모르는 이유는 언론이 이런 사건들을 잘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회사가 보상을 해주고 쉬쉬하고, 언론의 입을 막는다. 그래서 나는 대부분의 2030들 보다 노동조합이 필요한 이유를 보다 뼈저리게 느낀다. (물론, 대한민국의 노동조합들이 바르게 작동되고 있다고 생각치는 않는다.) 한 해에 수 십명의 노동자가 현장에서 죽는 울산에서 자란 나는, 누군가 노동 중 사망했다는 소식은 어릴 적부터 익숙해져 있었다.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의 라틴어) 같은 격언은 산업 도시 울산에서 없는 말과 같았다. 그런 곳에서 자란 나는 그런 사람들이 조금 더 잘 사는 국가를 보고 싶었다. 적어도 일하다가 어처구니 없이 죽지는 않는 나라를 바랐다.


사실, 중공업과 석유화학은 그 어디보다 힘든 노동이 요구되는 산업이다. 1970~80년대에 울산에 유치된 석유화학공장들은 세월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심하게 노화되어 매년 큰 사고를 한번씩 내고 있고, 중공업은 듣기만 해도 힘들 법한 일들만이 노동자들에게 요구된다. 여름이면 70도가 넘는 철판 위에서 두꺼운 옷을 입고 용접을 해야 하고, 대규모 선박의 조선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사고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어려운 일들은 더 이상 정직원들이 하지 않는다. 하청업체,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집중되어 있고, 그들의 임금은 정말 안타까운 수준이다. 작년에, 대우조선해양에서 대규모 파업이 있었다. 물론, 정권과 노동조합의 극단적인 맞대결로 화제가 되었지만, 그 대결의 배경이었던 하청업체의 임금 수준은 참혹할 따름이었다. 민주당의 이탄희 의원에 따르면, 2020년에 20년 간 용접기술자로 일한 노동자의 월 급여는 약 200만원이 조금 넘는 정도였고, 대우조선해양의 부도와 법정관리로 인해, 성과급은 0에 수렴했기 때문에, 그들은 생업을 유지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라고 한다. 동시에, 임원들은 2010년대 초반 정말 어려웠던 시절에는 1억 대의 연봉을 받았지만, 다소 안정이 된 지금에 들어서는 5억이 넘는 연봉을 받고 있다고 한다. 충격적이지 않은가. 20년 간 일을 했다면, 40대 중반, 50대 초반일 텐데, 연봉이 3000만원이 안 되고, 그것도 아주 살인적인 환경과 사고의 위험이 잇다르는 현장에서 일해야 했다고 한다. 나는 이런 상황들을 보면서, ”이런 사람들은 조금은 더 잘 살아도 될텐데”, “적어도 죽음의 위협은 느끼지 않고 일해야 하지 않을까”, “그들은 그럴 자격이 있을텐데..” 정도의 아주 지극히 당연한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을 정치가 할 수 있다고 배웠고, 정치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본 정부는 오히려 반대였다. 돈 많은 사람들은 돈을 더 벌 수 있도록 했고, 돈이 없는 사람은 더 적게, 더 힘들게 벌어야 했다. 기본 기조가 그거였다. 부자감세 서민증세. 심지어 기업가들은 법보다도 위에 있었다. 충격이었다. 내가 아는 국가와 정치와 달랐다.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박근혜 정권에서 이루어진 대대적인 중공업 구조조정이었다. 2010년대부터 중국의 빠른 성장으로 대한민국 중공업은 극심한 침체에 빠졌고, 그 책임은 경영자들이 아닌 노동자들이 지게 되었다. 계속된 구조조정으로 대부분의 사무직들은 희망퇴직 형식으로 회사를 떠나야 했고, 노동조합에 소속되지 않았던 노동자들부터 회사를 떠나 하청업체 같은 곳으로 가야 했다. 특히나 사무직들에게 그 여파는 심각했다. 내로라하는 경제학자들, 관료들, 경영자들이 앞장서서 탄력근로와 쉬운 해고를 외치면서 나는 보수주의와 경제적 자유가 얼마나 무섭고 차가운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노동자들에게 국가는 따뜻하지 않았고, 위기상황에서 경영자들이 그들의 자본금보다도 먼저 포기하는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경제학의 차가운 논리 앞에 우리집도 언제 가장이 구조조정의 대상이 될지 모르는 상태가 몇 년 간 지속되었고, 두려움에 떨어야 햇다. 당시 울산시 전체가 활력을 잃고 말았고, 문재인 정부 이후 조선업이 다시 호황을 맞기 전까지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노동자들은 계속해서 큰 피해를 보고 있었다. 그때 나는 돈의 논리에 대한 싫증을 느끼게 되었다.


그 당시 통합민주당, 새정치민주연합, 더불어민주당으로 이어진 야당만이 노동자들의 편에 섰고, 돈의 논리도 배제하지는 않았지만 '사람이 먼저다'라는 슬로건처럼 그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생각했었다. 완전히 정책을 바꾸지는 못했지만, 경제적 약자들에게 공감하는 모습을 우리는 보았고, 이론적으로 자유와 성장보다 평등과 복지를 외치는 야당을, 현실을 경험하지 않은 어린 나는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9년이라는 긴 야당 시절, 민주당을 책임진 손학규, 안철수, 문재인이라는 리더십이 외쳤던 '저녁이 있는 삶', '새정치', '사람이 먼저다' 라는 3가지 슬로건이 현실에 실제로 적용되는 사회를 상상하면서 그 당시 사회의 정치, 경제, 언론 전반을 장악한 세력에 대한 반발감을 키워가며, 그렇게 민주당에 대한 지지를 시작하게 되었다.


결국 내가 살아온 환경과 그렇게 살아오면서 보게 된 여러 가지 상황, 그리고 가장 중요한 시대적 사건들에 의해 민주당을 지지하게 된 것이다. 고작 중학생일 뿐이었지만, 뭔가 엄청난 소명이 생긴 것 같았다. 나는 커서 정말 못 사는 사람들, 정말 안타까운 사연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했다. 지금에야 밝히는 것이지만, 그때의 난 정치를 하고 싶었다. 70년 간 대한민국을 짓누르고 있었던 거대한 담론들에 도전하고 싶었다.


우리나라는 정말 강력한 자본주의 국가이다. 흔히 하는 말로는, 우리나라는 돈 많은 사람들은 그 어느 나라보다 살기 편하고 좋은 나라고, 돈 없는 사람들은 그 어느 나라보다 살기 힘든 나라이다. 안 그래도 좁은 나라에서, 인구의 절반이 나라의 12% 정도에 몰려서 살고, 동시에 이 체제의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 또는 체제 위에 대대손손 서기 위한 경쟁은 그 어느 나라보다 심해졌다. 청소년들이 가장 많이 자살하는 국가 중 하나가 되었고, 사교육비가 가장 많은 나라가 되었다. 결국 돈이 학벌을 만들고, 학벌이 다시 돈을 만드는 세상이 되었고, 계층 이동의 사다리는 점점 부서져 갔다. 동시에 '강남불패'와 '대치동'의 신화가 이어졌고, 부동산과 교육 정책이 세상에서 가장 잘못된 국가 중 하나로 만들고 말았다. 그리고, 저성장 시대로 이어지며, 청년 실업 문제도 타올랐고, 고령화 사회가 이어지며 그나마 남아 있던 복지인 연금 제도, 건강보험 등의 시스템도 위태로워지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나면, 맞벌이 가정이 많기 때문에, 보육시설에 맡겨지지만, 그 보육시설들의 문제도 상당하고,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순간, 온갖 사교육과 남들과의 비교와 경쟁에 맞닥드리게 된다. 중학교에 들어가는 순간 의대와 SKY를 가야지 성공한다는 이유로 더 큰 규모의 사교육과 영재교육, 경쟁, 입시가 시작된다. 고등학교는 그 절정에 있다. 스펙을 쌓기 위한 전쟁으로 모든 노력을 쏟아붓는다. 입시 컨설팅 학원이 생활기록부를 만들어주고, 백으로 좋은 내용을 담는다. 좋은 학교에 가서 엄청난 경쟁을 이겨내며 선생님들이나 학원이 엄청난 노력으로 써준 생활기록부로 대학에 가게 된다. 아니면, 대치동이나 인강 시장에 몇 년씩 돈을 부어가면서 수능을 통해 대학에 들어간다. 그렇게 열심히 들어간 대학을 나와도 취업을 못한다. 그리고, 어렵게 취업을 해도 수 십년 간 자기 집도 없다. 이 모든 과정에서 인생과 사회에 전혀 도움되지 않는 무분별한 갈등에서도 한 편에 서서 싸워야 한다. 보수와 진보의 갈등이라면 그나마 봐줄 만 하다. 남녀, 세대, 지역, 학벌 등등, 이 갈등에서 그렇게 좋은 결론이 도출되지도 않는다. 그저 그들에게는 싸울 명분이 필요한 듯하다. 조영태 서울대 교수에 따르면, 인구 밀도가 높은 것이 저출산의 가장 주요한 이유 중 하나라고 한다. 인구학적으로 인구 밀도가 높고, 그만큼 많은 개체들이 붙어있으면, 갈등이 늘어나고, 혼자 있는 것을 선호한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결혼과 출산을 꺼리게 된다. 우리나라의 젊은 사람들의 상당 부분이 살고 있는 서울의 합계출산율은 0.6명으로 나머지 지역보다 현저히 떨어진다. 취업하고부터 은퇴할 때까지 돈을 모아야 겨우 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나라가 되었고, 출산율이 0명 대를 기록하고 있는 유일한 나라가 되었다.


지금껏 이 사회를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기성세대를 탓하면서, 우리 세대가 기성 세대가 되고 2060년 정도가 되어 내가 기성 세대의 끝에 설 즈음이라면, 우리나라는 바뀔 것이라고, 적어도 그때보단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만약에 그렇게 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나는 이런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 노력하고 싶었다. 2060년에 미래세대의 누군가가 나라를 왜 이렇게 만들어 놓았냐고 물었을 때, 나는 그래도 이렇게 안 만들려고, 좋은 세상을 물려주기 위해 노력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만큼은 노력하고 싶었다.


그렇게 그들이 정권을 잡는 날을 수 년 간 기다린 끝에, 국정농단과 대통령 탄핵이라는 초유의 사태 끝에 문재인 정권이 2017년에 집권하게 되었다. 그리고, 임기 초반 적폐청산이라는 명분으로 권력 개혁 드라이브와 당시 홍준표 체제의 자유한국당에 대한 반발감으로 대다수 국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 결과, 2018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은 역대 최대의 승리를 거둘 수 있었고, 2020년 총선에서 연달아 역대 최고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 연이은 선거에서의 승리는 민주당, 그리고 대한민국 전반에 중대한 역효과를 내고 말았다. 박근혜 정부와 이명박 정부의 부패 인사들에 대한 수사가 일단락된 시점에서 문재인 정부는 더욱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에 시동을 걸었다. 사회 전반에 대한 대개혁이 시작되었다. 최저임금 인상, 검찰개혁, 언론개혁, 중대재해처벌법 등 수많은 개혁 시도가 이어졌다. 민주당 지지층 40%를 등에 업은 무분별한 개혁 시도는, 결국 모두가 알다시피 중도층의 이탈과 동시에 5년만에 정권 교체라는 한국 정치사에 전에 없었던 결과를 만들어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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