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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디오소년 May 23. 2023

조각을 찾아라

제8화.

이름이 두 개다.

자신과 달리 어질고 지혜로운 딸을 염원했던 여자는(결혼 후 한 달 만에 후회했다고 말했다) 슬기로울 혜, 슬기로울 지를 붙여 ‘혜지(慧智)’라고 지었다. 두 글자 모두 같은 뜻이다.         



      

하루아침에 엄마를 잃은 아이는 고향에 늙은 부모와 이제 막 짝을 이룬 동생네 부부에게로 인계되었다. 황망하게 아내를 떠나보낸 남자가 차선으로 고른 선택지가 7급 공무원이었기 때문이다. ‘단념’의 의미를 알고 있었을까. 다섯 살 아이는 울지 않고 잠들기 전 부모도 찾지 않았다. 노부부는 그런 손녀가 신통했고, 또 어떤 날은 몹시 안쓰러워했다.      


이듬해 할머니 손에 이끌려 병설유치원에 입학했다. 차로 10분, 등하교는 동생네 부부가 맡았다.


산달에 가까워진 작은엄마는 아침마다 솜사탕처럼 부푼 조카의 곱슬머리에 물뿌리개를 사정없이 뿌려댄 후빗질하기만도 힘에 부쳤다. 때맞춰 아빠가 과일보따리를 들고 쭈뼛거리던 여자를 데리고 나타났다. 젊고 혈기왕성한 아빠에게 재혼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두 번에 상처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할머니는 서울 사는 딸을 시켜 궁합을 보게 했다. (최근에서야 새엄마도 초혼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점쟁이는 뜻밖에 내 이름으로 트집이었다. 음양오행을 무시하고 지어진이름을 들먹이며 서른 줄에 단명의 위협이 있고, 게다가 아빠의 앞길을 막는다는 터무니없는 소릴 해댔다.








‘서윤’은 두 번째 이름이다.


이름을 바꾸는 것이 지금처럼 쉽지 않았다. 법원에서는 개명을 허가할 특별한 사유가 있을 것을 요구했다. 생명연장은 물론 관직에 나갈 아버지의 정사를 돕기 위함이라는 점쟁이의 주관적인 견해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서류도 복잡하거니와 무엇보다 돈 드는 일 앞에 아빠는 짐짓 망설였다.

“이름은 불리는 게 중요하지. 서류상에 적힌 건 아무 의미 없다더라.”

간신히 엄마가 지어준 이름을 지킬 수 있었다. 대신 아빠는 장 씨 일가가 모인 자리에서 ‘서윤’으로 부를 것을공표했다.


서윤은 스무 살만 기다렸다.

흡사 고문 기술자 같았던 새엄마와 희망이라고는 지리멸렬했던 아버지에게 보란 듯이 뒤통수를 치게 될 날을. 하루에도 열두 번 감정이 널을 뛰고 땅속으로 꺼져 버리고 싶은 순간이 찾아오면 치밀어오는 울분을 혼자서 삭였다. 오직 엄마를 찾겠다는 일념하나로 꾸역꾸역 시간을 버텨냈다. 어쩌면 그녀는 땅에 떨어진 그 순간부터 씨앗처럼 납작 엎드려 숨을 죽였던 것 같다. 혹독한 겨울이 가고 척박하고 단단한 땅을 뚫고 솟아오를 날을 손꼽으면서.


수능을 무사히 마치고 갈빗집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집이 아닌 '직장'이라는 연락처가 생겼고, 가장 먼저 찾은 곳이 경찰서였다. 신분증과 서류를 대조하고 상대의 이름을 확인하는 것으로 싱거운 ‘엄마 찾기’가 끝이 났다. 겨우 10분 남짓이면 끝날 일을 15년이나기다렸다는 사실이 억울했다. 경찰관은 연락처를 물었고 나는 갈빗집 전화번호를 또박또박 적어냈다.    








일주일이 채 지났을까.

사장님이 다급히 나를 불렀다. 올 것이 왔구나. 심호흡을 가다듬고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 네가 혜지가?"

여자는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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