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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니니 Jan 06. 2023

Life is NOT fair.

미국 할아버지의 노트

남편은 두 번째 확진이었고 아들은 처음이었다. 

첫 경험은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아무 생각 없이 확인차 해본 코로나 검사에서 남편만 양성 판정을 받은 것이다.

한국에서 왔으니 집에 먹을 것이 1도 없었고, 운전해서 마트도 갈 수 없는 상황 속에서의 확진이었다.

게다가 검사받고 결과가 3일 뒤에 나온 터라 이미 같은 공간에서 밥도 먹고 잠도 같이 잤다. 

즉 누가 잠재적인 무증상 확진자 인지도 모른다. 

한국은 보통 보건소에서 코로나 검사를 받아도 24시간 정도면 결과가 나왔다. 

그러나 올초 미국은 오미크론이 창궐하던 터라 무려 3일이나 뒤에 PCR 결과가 나왔다.

 

밖의 날씨는... 눈도 자주 내리고, 날도 정말 추웠다.

내복 자체가 없는 나조차 옷을 두 겹이나 껴입어야 할 만큼 추웠다(미국 집은 외풍이 심한 거 같음).

코로나 시대라 그런지 배달료에 팁까지 막 쓰면 배달 음식도 시킬 수 있었고, 마트 장본 것도 배달되었다. 

간혹 날씨가 안 좋을 때나 물건이 없을 때는 자동 취소되는 황당함도 있었지만 말이다.  


온 가족이 24시간 마스크를 썼다. 밥은 각자 다른 공간에서 따로 먹은 뒤 환기를 시키고 시차를 두어 다음 사람이 먹었다. 샤워할 때도 마스크를 쓰고 아이의 샤워를 도왔다. 

어렵게 미국에 왔는데 오자마자 확진으로 인한 격리라니... 집 밖을 보면 눈발이 흩날리고 어두컴컴하고, 집안은 시리도록 춥고 말이다(딱 내 마음이다). 


우리 가족은 코로나 시대 시작 이후 마스크를 잘 쓰고 동선도 간단하게 살았다. 걸릴 거리를 만들지 않겠다는 원칙이라도 세운 거처럼 말이다. 한국에 있을 때도 코로나 발발 이후에는 웬만하면 모임을 가지 않았고(점심시간에도 왕따를 자처함), 외식도 거의 하지 않았다. 접촉 관련 이슈가 들리면 집에서도 즉시 마스크를 쓰고 생활하고, 아이도 학원조차 최소한으로 하는 등 과하다고 할 정도로 방역의식이 높은 편이었다. 그래서 한국에서 안 걸리고 살았나 보다 싶었다.


한마디로 억울했다. 분했다. 

그렇게 조심하고 참았는데, 내가 안 걸리기 위한 노력이었고, 어디서 걸려서 옮길지 모르니 내가 매개체가 되지는 말아야 한다는 책임감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조심했는데...

격리 기간 중에 깊은 우울감과 불안감으로 아이 몰래 울기도 몇 번이었다. 격리가 끝나고도 한동안 무기력과 슬픔으로 힘든 시간이었다. 




두 번째 확진 때는 조금 달랐다. 아이가 먼저 걸려서 열이 났고 며칠이 지나 남편이 걸렸다. 열이 잡히자 아이는 집에서 편안히(?) 놀기 시작했고, 남편은 심하게 아팠다. 

한번 겪어봐서 그런지, 지금은 운전하고 장 보러 갈 수 있어서 그런지, 돌밥 돌밥 식사 준비도 전보다는 수월했다. 


첫 경험 때 남편은 다행히 무증상으로 거의 아프지 않았다. 검사 결과가 잘못 나온 거 아닌가 할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두 번째는 조금만 견디면 시간이 지나고 그러면 다 괜찮아질 거라 막연히, 안일하게 생각했다. 아이가 아무것도 안 하고 노는 것을 지켜보는데 평정심을 부여잡는 것이 조금 힘들 뿐이었다. 


그런데 남편이 많이 아팠고, 처방받은 약을 먹으면서 또 다르게 아파하는 모습을 보면서 불안했고 무서웠다. 

장을 보러 가면서(현재 확진자 외 가족은 활동에 지장이 없음) 

'불공평하네. 다들 마스크도 안 쓰고 저렇게 잘 들 다니는데도 안 걸리고. 우리는 지금까지도 잘 쓰고, 외식도 연말 돼서 몇 번 한 거뿐인데...'라고 억울한 마음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럼 너도 마스크 쓰지 말고, 놀러도 막 다니고 외식도 막 하고 그렇게 지내. 그럴 만한 깜냥이 안되잖아. ' 

한숨이 나온다. 맞다. 다시 태어나야 한다. 내가 겁나서 조심하고 산 것이고 또 그러다 걸린 것이지. 

그가 생각났다.   




그는 나의 영어 튜터였다. 

키도 크고 세련된 미국 할아버지다. 일흔이 넘은 당시에도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자원봉사로 나 같은 애들 튜터까지 했다. 

게다가 튜터 시간에 내 음료수까지 꼭 본인이 샀다(다른 튜터는 대부분 서로 각자 사거나 튜티가 사거나 했음). 인생 선배로 차 한잔 정도는 사줄 수 있다면서 말이다. 

다만 너무 얻어먹는 기분이 들지 않도록 2~3번 본인이 사면 내게 살 기회를 한 번씩 주곤 했다.


보통 튜터를 시작할 때는 큰 꿈(?)을 안고 시작하지만 이내 시들어지는데, 그와의 튜터 시간은 기다려졌다. 과하지도 않고 배려심도 있는 그의 모습이 멋있었다. 

동네에서 꼭 봤으면 하는 곳을 소개해주고 데려가기도 했고, 대화 속에서 무심결에 물었던 소소한 날짜를 기억하고 있다가 깜짝 축하 이메일과 선물을 챙겨주는 할아버지였다.

우리 아이는 그분을 '미국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아이와 장난도 치고, 그러면서도 자상하고 다정했다. 무엇보다 아이의 말을 귀 기울여 들어주었다. 


그분께 안 되는 영어로 신세한탄을 한 적이 있다. 

옆에 있던 메모지를 갑자기 쭉 찢더니 휘갈겨 써서 내게 내밀었다.

"Life is not fair. Always remember and keep it." 

일흔 넘게 살아보니, 어쩌고 저쩌고 하는 부연 설명 따위는 없었다. 다만 정갈한 메모를 건네면서 눈을 찡끗했다.







#삶의 진리 #인생 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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