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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peltina Feb 16. 2024

나도 결국은 며느리였어

분노와 반성, 그 사이 어디쯤

결국 구정 때 아버님께 기어코 사과를 받아냈다.

내가 프랑스 오는 날 싸우고 나서 첫 통화니까 거진 한 달 만이다.


"아버지가.. 그땐 미안허다."

"네.."


사과를 받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도 결국은 딸이 아닌 며느리여서겠지.





아버님과 다툰 건 내가 프랑스로 돌아오기 전날 통화 때문이었다.

이제와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내가 예민하게 반응했던 탓이였던 것 같기도 하고?


실제로 남편이 쓰러지고 난 이후로 몇 달간 3시간 이상 잠을 자질 못했다.

계속 걱정도 됐고, 처리해야 할 행정처리도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잘 상황도 아니었다.

한국행 비행기를 타는 날도 오전까지 근무를 해야 했고, 비행기 타고 온 바로 그다음 날부턴 꼬박 3주를 밤을 새워 남편을 간병해야 했다. 그리고 다시 14시간 비행을 한 뒤 다음날 바로 또 출근 일정.

이런 것들이 쌓이고 쌓이다 보니, 스스로는 괜찮다 생각했는데 실은 체력적으로 힘에 부쳤었나 보다.


그래서 평소라면 그냥 네- 하고 흘려들었을 텐데, 왠지 이번엔 그러면 절대 안 될 것 같았다.

함께 고생해 준 친정부모님들과 늘 안쓰러웠던 남편을 위해서라도 '아닌 건 아니다' 할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너는 그래서 프랑스 갈 거라고?"

"네? 아.. 네, 일단 계약도 묶여있고 오빠랑 같이 쓰던 논문도 마무리해야 하고요, 집도 그대로라 가봐야죠"

"아버지는 그건 아닌 거 같다"

"아버님, 저도 오빠만 두고 가는 게.."

"아이 됐고! 거기 그만두고, 와서 니가 병수발을 들어야지 누가 드냐?"

".. 아버님 오빠가 행여나 복직을 하더래도.. "

"아니 뭔 복직이여? 당장 너가 와서 얘를 돌봐야지. 너가 부분디!"

"저도 그만두고 와서 오빠 돌보면, 아버님 저야 좋아요. 근데 그럼, 저희 기본적으로 나가는 돈이며 그런 건"

"아이 참네! 그런 건 신경 쓰지 말고 와서 저, 오빠 돌보면서 중간중간 알바라도 하면 되지!

 안되면 뭐, 아버지가도 좀 도와줄 거고"

"... 아버님 이런 말씀드리기 죄송하지만.."

"아니 듣고 말고 할 것이 아니라, 니가 그만두고 와서 병수발을 들어야 할 것 아니냐"


아버님의 마지막 문장은 결국, 열지 말아야 할 내 입을 열었다.

결혼생활 7년 내내 보고도 못 본 척해줘야 했던 안타까움과 서러움이 담긴 문이었다.

나는 소리 한번 내지르지 않고, 뭐라도 하나 빼먹을까 차분하게 모조리 들춰냈다.


어머님이 아프셔서 병원비로 힘들 때, 남편이 학자금을 다시 대출받아 병원비로 쓸 동안 뭐 하셨는지.

그 학자금도 대학 다니는 내내 노숙에, 알바에 고생고생 하며 겨우 다 갚았던걸 다시 받았던 건 아시는지.

그가 쓰러지기 전까지 아버님의 보험료며, 시댁 공과금이며, 그 대출금이며 다 감당하느라 얼마나 스스로 하고 싶은걸 참고 살았는지.

늘 1주일에 한 번씩 전화드릴 때마다 새롭게 생겨나는 아버님의 요구를 들어드리느라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그리고 알게 모르게 계속 친정에서 도와주시고 챙겨주실 때마다 그가.. 내 남편이! 얼마나 미안해하고 스스로 주눅 들어했는지까지.


도대체 뭘 도와주실 수 있냐.

그가 쓰러지고 지금까지 오는 내내, 친정에서 인맥이며, 부탁이며, 가리지 않고 총 동원해서 도와주실 동안 아버님이 뭐 해주셨냐.

 

한번 열린 문은 결국 닫히질 못했고,

고요한 연못 같았던 시댁과 나의 사이는 온통 흙바다가 되었다.


"아버님께서 잘 생각해 보시고 미안한 마음이 드시면 연락 주세요. 저는 먼저 못 드릴 거 같습니다."

"니 맘대로 혀라!"


그게 한 달 전 마지막 통화였다.




어머님과의 사이라고 잘 지켜내지 못한 건 마찬가지였다.


유난스럽던 부모님 밑에서 자라 그래서인지 몰라도

삼 남매 중 누구 하나 아프다고 하면,

방방곡곡 좋다는 곳은 다 데려가야 직성이 풀리는 아빠와

좋다는 건 다 해먹여야 그나마 마음이 놓이는 엄마가 익숙했다.

보호자라면 마땅히 면역력에 좋다는 건 뭐라도 해주고픈게 당연한 거라 생각했다.


뇌종양에 좋은 건 뭔지, 다른 사람들은 뭘 하는지,

논문이니 치료후기니 다 찾아 읽어가며 좋다는 건 다 해주고 싶었다.


나뿐만 아니라 친정 식구들도 다 그랬다.

그래서 오빠가 퇴원해 친정에 있는 내내 격일로 있던 외래는 아빠가 늘 차로 데려다주고 데려왔고,

엄마는 병원 출근 전 남편용 반찬은 따로 만들어 놔 주고 우리가 쓰는 방을 소독해 주셨다.

동생들은 심부름과 설거지, 뒤치다꺼리를 도와줬고,

우리 집 멍멍이들과 고양이도 털을 싹 깎는 것으로 동참해 줬다.


근데 시댁은 문화가 다른 건지..

강아지 털은 안된다 말씀드리니, 남편이 방 안에 갇혀있어야 했고,

좋은 식단을 찾아 큰 달력에 써 붙여 드려도, 통- 뭐가 뭔지 모르시겠다고만 하신다.

오빠가 잠 귀가 예민하니 부탁드린다고 해도,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소음은 줄지가 않고,

갈아서 마실 주스만이라도 좀 부탁드려 봐도 조리법이 너무 어렵다고만 하신다.

이러니.. 암 수술 이후 회복에 도움이 되는 요양병원 좀 알아보셔달라 부탁이나 할 수 있겠나..

결국 내가 해야 하는데, 내가 못하고 있는 거니.. 내 탓이다 싶은 자책감만 커진다.


게다가 그마저도 발목이 부러지신 이후엔, 병원에서 침대에만 있으라고 했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소변통 갈아달라, 소독해 달라, 약 챙겨달라 누워서 시키시기만 하시는 바람에  

남편은,

내가 부탁한 운동과 식단을 지켜가면서, 설거지도 하고, 청소도 하고, 심부름도 하고, 밥도 스스로 차려먹느라 힘에 부쳐하는 게 전화로도 여실히 느껴졌다.

그래서 결국 통화를 하며 함께 펑펑 우는데,

옆으로 데려오지도 못하고, 시댁에 놔두자니 고생하는 남편이 안쓰러워 어머님께 화만 더 나더라.

이것도.. 내가 어머님 딸이 아니라 며느리라서겠지.


뭐, 결국 그래서

깁스 사진 덜렁 보내시며 어리광하고 싶어 하시는 어머님께


"어머님, 조심히 방이라도 걸어 다니시고 화장실이라도 스스로 다니셔야지 안 그러면 당뇨도 있으신대 다리 혈액순환 안돼서 썩어요"

"아니 발 디디지 말래서~"

"그래서 목발이랑 보조기 준거예요 병원에서.

 지탱해서 움직이고 그러셔야지 안 그럼 큰일 나시는데?"

"그래?"

"네"


라고 겁을 주는 걸로 슬쩍 화풀이했다.

물론 그 전화 이후로 바로 걷는 연습을 하시는 모습에서..

하실 수 있으시면서 그러셨다는 거에 더 분노하고 속상해야 했던 건 나였지만 말이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내 시부모님이라,

이런 글 쓰면 내 얼굴에 침 뱉기요, 내 남편의 상처일걸 알면서도

분노에 사로잡히고 서운함을 털지 못해 글을 쓴다.


이것만 봐도 나는 시부모님 딸이 아니라 며느리, 딱 그 사이였구나.

착한 척, 참한 척, 아닌척해도

결국은 나도 딱 며느리였다.


으이구! 못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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