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잊히지 않고 그대로 자리 잡고 있는 기억들이 있다. 이 기억들은 기억상실증에 걸리지 않는 한 나와 계속 함께 할 것이 분명하다.
어떤 기억들은 잠시 꺼내봤는데도 절로 웃음이 난다. 마음도 따뜻해진다. 그런데 반대인 기억도 있다. 그냥 잊고 싶은데도 가끔씩 불쑥 튀어나와 나를 건드린다.
글을 통해 좋은 기억은 다시 꺼내 만끽해 보고, 그렇지 않은 기억은 조심스레 달래보고 싶다.
첫 번째 기억 이야기는 '봄'이다.
이제 겨우 예닐곱살인 이 아이는 봄을 좋아한다. 봄이라는 녀석은 길고 긴 차가운 겨울 동안 꼭꼭 숨어 있다가 어김없이 아이에게도 찾아온다.
봄이 빼꼼히 얼굴을 내밀면, 아이는 이제야 왔다며 반기며 들로 산으로 봄을 마중 나간다. 아이는 길가에 앙증맞게 피어있는 냉이꽃을 먼저 만난다. 작은 손을 활짝 펼쳐 부드러운 꽃잎을 하나하나 느낀다. 작고 하얀 이 꽃이 너무나 귀여워서 허리를 숙여 인사도 건넨다. 하얀 꽃도 마치 아이가 반가운 듯 봄바람에 몸을 실어 산들산들 흔들어준다.
아이는 바쁘다. 이번엔 노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개나리를 만나러 돌담으로 몸을 옮긴다. 개나리들이 합창하듯 입을 크게 벌려 노래를 하고 있다. 아이도 덩달아 흥얼거려 본다. 꽃잎 하나를 따서 머리 위로 팔을 번쩍 들어 올린다. 그리고 빙그르르 돌리며 떨어뜨려 본다. 아이는 이 모습이 마치 노란 별이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생각한다.
고개를 들어 산을 바라본다. 산은 아이를 맞을 설렘에 얼굴을 벌써 붉히고 있다. 연 분홍색 치마를 입은 진달래들이 여기저기 모여 아이가 왔다며 소곤거리고 있다. 아이는 보드라운 진달래 잎에 입을 맞춘다. 진달래는 이내 더욱 얼굴을 붉히는 것 같다.
아이는 봄노래도 지었다.
"봄이 왔어요. 새 봄이 왔어요. 봄이 왔어요. 새 봄이 왔어요. 하늘에는 반짝이는 태양이 빛나고, 들판에는 꽃들이 노래를 부르네. 행복해요. 나는 나는 정말 정말 행복해~".
봄도 행복한 이 아이를 보러 다시 꼭 오겠다고 약속하는 것 같다.
어릴 적 나에게 봄은 온통 흥미롭고 생기를 불러일으키는 대상이었다. 그 기억 때문에 지금도 봄만 되면 나도 모르게 그때 그 아이가 되어 손을 뻗어 어린 풀잎들을 쓰다듬곤 한다. 포근한 그때의 봄을 떠올리면 마음도 봄만큼 너그러워지는 것을 느낀다.
지금 가는 봄이 아쉽지만, 어릴 때 그 아이에게 약속한 것처럼 내년에도 다시 만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