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
나는 딸부잣집의 막내딸인데 첫째 언니는 수재고 둘째 언니는 착하고 예뻤다. 얼굴도 안 보고 데려간다는 셋째 딸은 어릴 때부터 별명이 '모노'였는데 의미는 '못난이'였다. 언니들에 비해 못생긴 게 성질도 더럽다고 그렇게 불렀다나 뭐라나! 나를 모노라고 불렀던 어른들이 집에 오면 엄마 피셜, 그 사람이 갈 때까지 울었다고 한다. 어릴 때 나는 아기 복어 같았는데 누가 건드리면 금세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고 아무 데나 박아댔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그 자리를 떠나든 그 사람이 떠나든 양단간에 결판이 나야 했다.
큰 언니는 학교에서도 학원에서도 공부나 학습능력이 우수하기로 유명했다. 어린 시절 큰 언니는 나와 싸우거나 기분이 나쁘면 동생에게 '바보'라는 말을 자주 했다. 내가 아주 똘똘했다면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성적은 나의 아킬레스건이었다. 왜 나는 언니보다 공부를 많이 하는데 성적은 잘 나오지 않는지 열등감에 차 있었다. 그때 듣는 '바보'는 어느 욕보다 타격감이 컸다.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옛이야기 중에, 큰언니의 '수능꿀잠사건'이 있다. 언니가 대입 수능시험 사탐시간에 꿀잠을 잔 것이다. 말 그대로 깜박 졸았던 것이 아니라 잤다고 한다. 언니는 수능이 끝나고 와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엉엉 울었는데, 그때 사탐을 망쳐서 SKY 중에 K대학에 진학했다.
작은 언니는 어떤가. 엄마 왈, 나는 눈물도 안 나면서 소리만 질렀고 언니는 소리도 없이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 나는 화가 나서 분에 못 이길 때 울었고, 언니는 슬프거나 무서울 때 울었다. 소같이 크고 순한 눈을 가진 작은 언니는 착하고 배려심이 많았다. 언니는 아무 하고나 잘 어울렸고 주변 사람들을 편하게 해 주었다. 나는 못생긴 것은 아닌데 삐삐처럼 삐쩍 마르고 성깔이 대단했다. 공부는 어떻게 남들보다 2~3배 더 하면 될 것 같은데 얼굴하고 성격은 바꾸고 싶을 만한 열정이 없었다.
나란 사람은 전두환 대통령 시절부터 수학학원에 다녔고, 노태우 대통령 부임부터 원어민 영어학원에 다녔으며, 김영삼 대통령 시절 수학 고액과외를 하고, 김대중 대통령 시절 내내 강남과 종로의 영어학원을 다녔다. 어머니 왈 '너의 학원비면 지방에 집도 샀을 것'이 라고 말하는 사교육 키즈였다. 엄마는 밥은 안 먹어도 공부는 시킨다는 주의였다. 학원만 다녔느냐? 아니다. 고등학교 내내 버스와 지하철을 타면 폭 1cm 길이 1m의 종이에 영단어를 깨알같이 적어서 외우고 다녔고, 자율학습을 하지 않는 학교였음에도 교장선생님에게 건의하여 야간자율학습을 부활시키기도 했다.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해야 할 공부 양을 정해 수다도 떨지 않고 공부했고, 주말이면 도서관에서 친구와 9시까지 만나 18시까지 수능시험 스케줄 대로 실전 모의고사를 풀고 답을 매겼다. 10시에 학원이 끝나면 엄마가 하는 송파의 음식점 앞의 독서실에서 1시까지 공부하고 엄마의 퇴근에 맞춰 분당의 집으로 갔다. 학교 선생님들에게 문제집을 선물 받고, 친구들과는 명절 '수학의 정석' 풀기 내기를 했다. (한 번도 벌금을 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하루 14시간 이상 쉬지 않고 3년을 공부해서 수능을 봤지만 꿈꾸던 SKY는 원서도 넣지 못했다. 그 당시에 엄마가 그러셨다. '너는 한국의 교육과는 스타일이 안 맞는 것 같다.'라고 말이다. 공부는 하는데 그만큼 성적은 안 나오는 딸에게 화도 못 내고 안타까운 마음에 용기를 주려고 하신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믿었다. 나는 똑똑한데 우리나라 입시체계와는 맞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래도, 더 좋은 대학을 가지 못한 학력콤플렉스는 여전히 나의 족쇄였다. 내가 내 기대만큼 멋지게 보이지 않았다.
열등감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전혀 다른 방향에서였다.
나는 '안 예뻐'라고 제쳐놓고 포기한 연애세포가 워킹홀리데이로 영국에 가면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웠다. 웬걸. 외국에서는 먹어주는 얼굴이었나 보다. 지금 생각하면 어린 동양인 여자를 좋아하는 일부 (지질한) 백인들의 플러팅인데, 그 당시의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힘든 외노자 시절( https://brunch.co.kr/@highnoon2022/236 )의 별사탕 같은 기쁨이었다. '나는 외국의 남자와 스타일이 맞는 건가!'라고 한 번 자신감이 생기니 한국에 돌아와서도 그 기세가 줄어들지 않았다. 귀신같이 남자들이 먼저 알았다.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쪽박 차던 소개팅도 했다면 에프터가 들어왔다. 그전에는 남자들이 '무섭다' '이상하다' '나랑은 안 맞는다'라고 하여 주선자를 곤혹스럽게 했는데 말이다. 그렇게 영국에서 한국으로 온 후로는 삶의 중심을 로맨스가 차지했다. '공부고 나발이고 연애가 최고지'로 삶의 가치가 바뀌었다.
자신감이라는 것이 한 곳이 다소 부족해도 다른 한 곳이 넘치면 바닥에 흐르지 않고 옆으로 나눠지는 가보다. 여자로서의 자신감이 높아지니 공부에 대한 열등감도 이전보다 옅어졌다. '그게 뭣이 중헌디.' 같은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연애를 하면 상대는 주로 똘똘이였다. 열등감으로 사람이 쪼그라들지는 않았지만, 나에게 부족한 면을 상대에게서 채우려는 대리만족과 대학순위와는 별개의 지적인 자신감이 영향을 줬던 것 같다. 후에 여전히 남아있던 학업에 대한 열등감은 결국 유학을 가는 성취경험으로 화끈하게 해소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notwsustudnet )
오랜만에 '모노'로 불리던 시절의 사진을 보니 그저 귀엽다. 왜 어른들은 그때의 나를 못난이라고 했는지 믿기 어려웠다. 작은 모노의 표정을 보면, 그런 말과는 상관없이 해맑고 밝았다. 열등감은 없었다. 못생겼다는 스스로의 평가도 공부를 잘 못한다는 생각도 아이의 얼굴에는 없다. 열등감은 여성스럽지 못하고 천방지축이라는 어른들의 부정적 평가와 학교 성적이 연결되면서 생긴 것이다. 영국에 가기 전의 나도 갔다 와서의 나도, 인기가 있을 때의 나도 매번 까일 때의 나도 지금 보면 다 예쁘다. 학업에 대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던 10대의 나도, 열등감을 털어냈던 20대의 나도 같은 사람일 뿐이다.
내가 나를 생각하는 태도와 표정이 달라졌을 뿐 실제 나는 모두 같았다.
나는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