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인가 하녀인가
우리 가족은 배달음식을 (거의) 시켜 먹지 않는다. 그 흔한 배달어플이 하나도 안 깔려 있다. 쓰레기가 너무 많이 나와서 안 시키기도 하고, 자극적이거나 기름진 음식을 잘 안 먹기 때문이기도 한다. 1년에 한 번 정도 치킨을 먹는데 선물 받은 쿠폰이 있을 때나 동네에서 테이크 아웃으로 사 와서 먹는다. 나와 남편은 세끼, 학교에 가는 아들은 두 끼를 꼬박 먹는다. 2011년에 결혼해서 지금까지 여행을 가거나 연수, 산후조리를 한 시간을 빼고 하루도 밥을 하지 않은 적이 없다.
난 명실상부한 주방의 여왕이다.
그리고 지금 공포의 방학이 왔다. 아들까지 집에서 세끼를 먹는다. (맙소사!) 아들은 주문이 까다롭기 때문에 그 녀석이 끼면 손이 두배로 많이 간다. 남편은 해산물과 고기 가리지 않고 다 좋아하고 한국인답게 국과 찌개를 좋아한다. 가장 무난한 사람이나 기저질환 때문에 저염식, 잡곡밥을 먹어야 한다. 라면은 1~2주에 1회 특식이다. 아들은 아빠가 먹어야 하는 잡곡밥과 싱거운 음식을 싫어하고 비리지 않고 부드러운 흰 살 생선은 먹지만 다른 생선과 해산물은 일절 먹지 않고 고기를 살짝 구워서 질기지 않게 먹는 것을 좋아한다. 채소는 좋아하지 않고 버섯류는 전혀 안 먹고 콩류도 싫어한다. 나는 고기를 좋아하지 않고 징그러운 재료는 안 먹고 해산물은 비린 것은 좋아하지 않고 익히지 않은 것은 거의 안 먹는다. 주로 채소와 콩류를 좋아한다. 다시 말해 중구난방이다. 괴물딱지지만 하나뿐인 귀요미이기도 하기 때문에 아들이 좋아하는 쌀밥과 간이 있고 고기 단백질이 풍부하고 맵지 않은 조리로 녀석의 음식을 따로 만들어야 할 때가 많다. 게다가 아들은 외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12시 10분에 남편이 출근하기 때문에 10시 반이면 점심밥을 준비한다. 미리 씻어놓은 쌀을 압력밥솥에 올리고, 반찬을 만들기 시작한다. 채소가 찌개처럼 잔뜩 들어간 국을 끓이고 함께 먹을 전이나 볶음을 만든다. 지금같이 햇감자가 나올 때는 강판에 감자를 갈아 감자전을 해 먹고 가을에는 아침에 도토리 묵을 만들어서 식혔다가 점심에 먹는다. 이도 저도 없을 때는 채소를 잔뜩 때려 넣고 뚱뚱한 계란말이를 만들고, 시간이 많으면 두부를 잔뜩 넣은 동그랑땡을 만들어 먹는다. 아들이 질기고 향이 센 나물을 좋아하지 않아서 산나물을 무치면 아들이 먹을 시금치나 숙주나물을 따로 만든다. 대단한 요리를 하는 일은 별로 없고 반찬이 많지는 않지만, 장봐온 재료를 이용해 매일매일 해 먹는다.
오늘은 오랜만에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활짝 열고 김장김치와 두부가 듬뿍 들어간 청국장을 끓였다. 같이 먹을 계란프라이와 도토리묵, 멸치볶음과 오이김치, 풋고추/쌈장도 내놨다. 원래 대패삼겹살에 갖은 야채를 구워 먹으려 했으나 아들이 알레르기가 심해져서 아침 일찍 병원에 갔는데 의사 선생님이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고 해서 못 먹었다. 남편의 저녁 도시락에는 잡곡밥에 채소가 잔뜩 들어간 열무비빔밥과 미역냉국을 넣어주었다. 매일매일 고민이다. 뭘 먹을까?
사실 주방의 여왕보다는 주방의 하녀가 더 맞는 것 같다.
나는 어릴 때부터 그랬다.
라떼는 학교에서 급식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도시락을 싸서 다녀야 했다. 엄마는 음식점을 했기 때문에 저녁 늦게 와서 아침에 늦게 일어났다. 힘든 엄마를 깨우고 싶지 않아서 스스로 도시락을 싸서 다녔다. 나까지 늦으면 아빠가 간혹 대충 싸주기도 했지만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초등학교 4학년부터는 스스로 싸서 가져갔다. 저녁에 아빠가 오면 아빠 밥을 차려 주는 것도 나의 일이었고, 가끔이지만 친척들이나 손님이 왔을 때도 내가 밥을 차렸다. 다 기억은 안 나지만 엄마가 가게에서 김치나 반찬을 가져오면 그것들을 먹기도 하고, 그때그때 내가 먹고 싶은 계란이나 두부, 감자, 냉동식품이나 인스턴트 음식들을 조리했다. 된장찌개나 미역국 같은 것은 스스로 했던 것 같다.
주방은 내 공간이었다. 엄마는 일을 하지 않을 때도 밥 차리는 것을 싫어했다. 매주 같은 반찬을 무한 반복했다. 지금도 싫어해서 우리가 가도 밥을 해줘야 하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집이 산 속에 있어서 배달도 안 되고 어쩔 수 없어 주긴 주는데 엄마가 정말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하는 것을 안다. 반찬을 잔뜩 만들어 놓고 3일이면 3일 5일이면 5일을 계속 같은 반찬을 내 준다. 어릴 때도 그랬기 때문에 낯설진 않다. 엄마가 가족들에게 밥해주는 것을 싫어하는 것을 이해는 했지만 좀 서운한 때도 있었다. 영국에 워킹홀리데이를 갔을 때, 아는 분이 런던에 오신다고 해서 엄마에게 반찬을 좀 해다 줄 수 있는지 부탁했었다. 그 당시 한국인 하우스 메이트인 친구가 한국 반찬이 너무 먹고 싶다고 해서 어쩌다 부탁을 하게 된 것이다. 엄마가 반찬 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알았지만 그래도 외국에서 딸이 부탁하는 것이니 기대가 있었다. 친구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반찬뚜껑을 열었을때, 그 실망스러운 눈빛이 잊혀지지 않는다. 가로 세로 30cm 정도 되는 정사각형 반찬통 안에 반찬통 4개가 들어있었는데 멸치, 새우, 진미채 같은 마른 반찬이 똑같은 양념에 볶아져 각각 담겨 있었다.
"와! 재료는 다른데 양념이 다 똑같아. "
친구가 말했다. 누가 봐도 같은 후라이팬에 다른 재료를 같은 양념으로 볶은 것이었다. 엄마는 그 안에 뭐가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 당시 주방 아줌마가 아마 보너스도 없이 사장의 외국에 있는 딸의 반찬을 투덜투덜하며 만들었던 것 같다. 조미료가 잔뜩 들어간 달근하고 맛없는 밑반찬. 그 뒤로 미국에서 유학을 할 때도 엄마 한테 반찬을 부탁한 적이 없다. 엄마는 너무 바빴고, 주방일이나 집안 일을 싫어하는 사람이고 장사를 하고 주식이나 부동산 같은 재태크에 능했다. 우리를 먹이고 입히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교육만큼은 남부럽지 않게 시켰다. 엄마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래도 나는 결혼을 하면 시간이 많고, 매일매일 건강한 밥과 반찬을 해주는 아내가, 엄마가 되고 싶었다. 그럴려면 안 바빠야했다. 가족들이 내가 한 밥을 먹고 싶어서 집으로 오고 싶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안 바쁜 아내. 안 바쁜 엄마. 밥 냄새 나는 집.
내가 그래도 하녀가 아니라 여왕인 것은 주방에서는 다 내 맘대로이기 때문이다. 그건 꽤 큰 권력이다. 아들은 까다롭고 많이 먹지도 않지만 제때 꼭 밥을 먹어야해서 아무리 화가 나도 밥 먹으라고 하면 나온다. 안 나오면 치워버리기 때문이다. 아들은 어딜 가도 엄마만큼 자기 입맛에 맞게 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남편은 배꼽시계와 수면시계가 정확한 사람이라 평일에는 아침 8시, 점심 11시 30분, 저녁 5시 (야식 10시 30분)을 기계처럼 지켜 먹는다. 늦으면 여지없이 꼬르륵이다. 간혹 그가 밥 하는 것을 도와주면 나는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지랄 맞은 셰프다. 조수의 의견 따위는 싹 무시하고 시키는 대로만 빨리빨리 질질 흘리지 않고 해야 한다. 여왕은 부탁하지 않는다. 명령한다.
생각하지 마. 시키는 대로만 해.
주방의 법칙이다. 내가 곧 법이다. 주방은 모든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고유 영역이다. ㅋㅋㅋ 밥이 너무 중요한 부자는 아니꼽고 더러워도 그냥 시키는 대로 한다. 대신 그들의 건강과 선호도를 적극 고려한 맛있는 밥과 반찬을 매일 먹을 수 있다. 그게 싫으면 누구든 주방의 왕, 주방의 왕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1년 365일 365회 이상 밥을 해야 한다. 그것이 주방의 여왕이 갖는 왕관의 무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