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게 쓰고 건강하게 먹기(6)
어렸을 때 엄마가 원목으로 된 블록 장난감을 사주신 적이 있습니다. 블록은 원뿔형, 삼각뿔형, 직사각형 이렇게 세 형태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저는 그것들을 가지고 주로 건물을 만들었습니다. 그날그날 성(城)을 만들기도 하고, 집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블록을 쌓고 나서는 작은 인형들을 가지고 인형 놀이를 하곤 했습니다. 아마 그때부터 스스로 기획하고 구현하는 일을, 또 스토리 만드는 걸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어른이 되고 나서도 성향이 바뀌진 않았습니다. 혼자 잘 놀고, 홀로 있는 시간이 가장 편안했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과 있을 때 제 자신이 온전치 않다고 느껴졌습니다. 사회성이 없는 건 아니었습니다. 친구들과 만나면 잘 얘기하고 잘 웃고, 모르는 사람과도 스스럼없이 대화를 잘 나눕니다. 다만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특히 다수의 사람들이 있을 때– 그리 편하지는 않았습니다. 제 안에서 어떤 의무감이 항상 비집고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즐겁고 행복해야 해. 내가 웃음을 줘야 할 것 같아.’
어떤 이들은 긴장이 되면 움츠러들지만 저는 긴장이 되면 흥분을 하는 편입니다. 친구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즐겁지 않은 건 아니지만 긴장이 돼서 아드레날린이 솟구칩니다. 꼭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만 튀어나오는 인격이, 사람들과 있으면 숨어있는 제 자신을 잡아먹는 것 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 약속을 줄이기 시작했습니다. 기념할 일이 있거나 연말처럼 특별한 시즌에는 다른 사람과 시간을 보내지 않고 나 홀로 파티를 했습니다. 평소에 꺼내지 않는 식탁보도 꺼내고, 조명도 손봐서 제가 좋아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등 근사하게 식사를 차리며 시간을 보내는 식입니다.
어떤 파티냐에 따라 요리도 달라지고 요리에 내놓는 접시도 달라집니다. 요즘 같이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파스타와 찹스테이크를 합니다. 할 때마다 소스만 달라질 뿐이지, 사실 아예 색다른 요리를 내놓지는 않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파티에 파스타와 찹스테이크, 이 두 메뉴가 없다는 것을 좀처럼 상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원목 블록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파티를 기획하고 준비하는 일이 얼마나 재밌고 행복한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서른이 넘어서도 혼자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던 아이처럼 여전히 홀로 시간을 보낸다는 사실을 자각하면 저 스스로 측은하고 가련하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다른 사람과 함께 요리하고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시간을 보내는 건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특히 ‘같이 요리해서 먹을까요?’라는 그 말이 저는 아주 무겁게 느껴집니다. 단순히 ‘밥 먹자’는 말과 달리, 누군가에게 친구와 목욕탕을 가는 일만큼, 우리 집 가정사를 꺼내 놓는 것만큼 어렵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같이 요리해서 먹자고 하면 덜컥 겁이 납니다. 내 속살을 다 보여주게 될 것만 같아서요. 요리해서 함께 먹을 친구를 바라면서도 그 일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이 사실을 깨닫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요리하는 순간은 저한테 지극히 사적인 시간입니다. 계획적으로 재료를 준비하지만 즉흥적으로 요리하고, 맛이 있든 없든 내가 만든 음식을 가장 맛있게 먹을 줄 아는 시간입니다. 모순적인 내 모습, 실패한 결과, 좋은 결과 모두 발산하는 때가 바로 요리를 할 때입니다. 그런 제 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여준다는 게 참 쑥스럽습니다. 아직 마음에 준비가 안 됐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나 홀로 파티에는 쓸쓸함과 안도감 그리고 즐거움 등 이런 양가적인 감정이 동시에 느껴집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기분은 제가 연말을 늘 잘 마무리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마음이나 생각이 들뜨지 않고 차분하게 가라앉혀주면서 한 해를 돌아보게 만듭니다. 이 시간은 파티의 요리만큼이나 또 다른 메인 디쉬입니다. 올 한 해 감사했던 것과 올해의 키워드들을 정리하고 나면, 올해 있었던 일이 정리되면서 내년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방향이 조금씩 잡힙니다.
언젠가 마음의 준비가 되면 연말을 함께 보내는 사람들을 통해 이와 같은 인사이트를 얻을 수도 있겠지만, 저에겐 아직 이 방식이 가장 좋은 방식인 것 같습니다. 누구보다 올해 고생하고 힘들었을 나를 가장 잘 아는 건 제 자신이니까, 가장 잘 위로하고 용기를 줄 이도 제 스스로일 것 같거든요. 그래서 당분간 계속 이렇게 지내게 될 것 같습니다. 훗날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연말도 너무 마음의 문을 닫아놓지는 않겠지만요.
사진. 헵시바